내가 하느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사람들이 내게 오지 않고 하느님께 몰려가도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해도
그를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잘하는 거라고 칭찬하고 여전히 사랑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을 묵상한 내용입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업적을 숨기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과 업적을 소문내지 말라고 엄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이러시는 겁니까?
꼭 이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렇게 하심이 주님께서 겸손 떠시거나
당신을 더 높이시려는 인기 전술이거나
괜히 그러시는 것이 아니고 진심이라면
사람들의 사랑을 아버지께 돌리기 위해
당신께는 머물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사랑을 숨기는 이유는 사람들의 사랑이 당신께만 머물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그 목적은 사람들의 사랑이 당신을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절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정이 들었지만 좁은 고향을 떠나야 하고,
더 큰 스승을 만나도록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주님께 넘겨야 하며,
자식이 평생의 짝을 만나기 위해서는 부모 곁을 떠날 수 있게 해야겠지요.
그런데 만일 아들을 너무 사랑하여 마마보이가 되게 하고,
자기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면 진정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가 아니겠지요?
만일 이렇게 한다면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며
결국 참사랑이 아니라 욕심이요 애욕이겠지요.
이런 애욕은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자기도 불행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 사랑 안에 가둘 뿐 아니라 자기도 그 사랑에 갇히기 때문인데
그런데 이런 사랑만큼 지옥도 없습니다.
옛날 노래에 ‘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수 없네’라는 노래가 있는데
애욕이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무엘기는 또 다른 사랑 욕심에 관한 얘기입니다.
여인들의 사랑이 자기한테서 다윗에게로 향하자 사울이 시기 질투하는 얘기입니다.
어른이고 왕인 자기가 그 어린애를 두고 시기 질투하니
그런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그 마음은 얼마나 지옥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감정이 오죽 복잡하고 지독하면 죽여야겠다고 마음먹기까지 하겠습니까?
요즘 데이트 폭력이니 스토킹이니 하는 말이 무성하고,
그런 사랑에서 비롯된 살인이 빈번한 것이 다 이런 사랑의 현상입니다.
애욕이란 시기 질투하게 하고 가질 수 없으면 죽여 없애버리게 하지요.
그런데 제 생각에 이것이 다 넓은 사랑의 바다에 도달하지 못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마치 사랑이 수족관에 갇힌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바다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면
인간의 하찮은 사랑에 매이지도 갇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두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나도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고,
너도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도록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가두지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