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북쪽 끝 티로와 시돈에서부터
남쪽 끝 이두매아까지
이스라엘 전지역에서 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들어서
예수님께 몰려왔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의 소문이 벌써 이스라엘 전지역으로
퍼졌습니다.
그들은 병을 치유해 주신 이야기와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안식일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논쟁하신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사람들은 예수님께 몰려오게 됩니다.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직접 보고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반면 오늘 이야기는
치유나 구마를 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복음을 시작하면서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물러가셨다는 표현이 나오고
중간에서는 군중에게서 떨어지려
거룻배를 타시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당신이 누구이신지
직접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사람들의 기대를 채워주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더러운 영이 말하는 것도
하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섣부르게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작은 행동에도
사람들은 크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과장되게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 당신의 원래 모습을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알 수 있을 때
당신을 드러내시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대를 예수님께 투사해서
예수님은 이런 분일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들의 기대가 깨질 떄 실망하게 되고
그 실망의 원인을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에서 보지 않고
예수님 탓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대와 맞지 않는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 많은 관계를 맺습니다.
관계는 나를 알아가고 상대방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정확한 모습을 찾아가려는 노력보다
내가 상상하는 모습을 그 사람 안에서 찾으려는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온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모습만 고집한다면
결국 우리는 고립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힘들더라도
객관적으로 나를 보고
상대방을 보려는 노력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