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사울은 “주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라고
결심하고 요나탄에게 약속했지만 오늘 그 마음이 바뀌어 죽이려 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마음이 자꾸 바뀌는 것인데,
사실 인간의 결심이라는 것이 그리 항구하지 않고 자꾸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서약을 하는 수도자들에게 결심하지 말고 서약하라고,
서약도 인간에게 하지 말고 하느님께 서약하라고 강론에서 충고합니다.
그렇지요.
결심은 혼자 하고 약속은 둘이 하는 거지요.
그러니 혼자 한 결심은 언제고 자기 마음대로 깰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약속은 일방적으로 깰 수 없고,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깰 수 있는 건데
사람 간에는 혹 약속을 헌신짝처럼 깨어버리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의 서약은 하느님과 약속이니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사울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느님께 항구한 다윗과 사울의 차이점입니다.
어제 결심한 대로 사울 안에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면 죽이지 않는데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게 되면 시기심과 증오심이 되살아납니다.
그런 것입니다.
내 안에서 하느님이 살아 계시면 인간적인 악감정은 죽어버리고,
하느님이 죽어계시면 인간적인 악감정은 되살아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왜 이렇게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되고
다윗은 어떻게 그렇게 항구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오늘 다윗의 말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다윗이 임금님을 해치려 합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곧이들으십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동굴에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임금님을 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니 나의 주군에게 결코
손을 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살려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사울과 다윗 주변에
인간적인 조언을 하는 무리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귀가 얇았고 다윗은 귀가 두꺼웠습니다.
귀가 얇다는 말이 있지요?
인간의 말을 걸러내는 기능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말씀만 받아들이고 인간의 말은 걸러내는 기능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느님의 말과 인간의 말을 걸러낼 수 있었습니다.
확고한 식별 기준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니 내가 어찌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사람도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니 내가 해선 안 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진정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하느님 뜻대로 해야지 내 감정대로 하거나 내가 감히 어찌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믿음과 기준이 다윗에게 있었던 겁니다.
귀가 뚜꺼워야지 얇아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지 인간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울과 다윗의 얘기에서 가르침 받고 교훈 삼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