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집으로 가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집이라!
그런데 바로 이어서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집은 고향 집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저기 복음을 선포하러 다니셨으니
당신의 집이 따로 있을 리 없고
우리네 집을 당신 집으로 삼으셨을 겁니다.
즉시 프란치스코가 떠오릅니다.
그는 자신과 형제들의 가난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형제들은 집이나 거처 그 어떤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순례자와 나그네처럼 동냥하러 다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해지셨으니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라고 하면 그만인 것을
프란치스코는 굳이 집과 거처의 가난을 꼭 집어서 얘기하는데
그것은 집과 거처의 가난을 특히 더 강조하기 위함이겠습니다.
집도 없고 정처도 없는 것이 주님과 프란치스코의 공통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가난을 가난 중에서도 최고의 가난이라고 하고,
이 가난이야말로 물질 면에서도 가난하게 하고,
덕행 면에서도 가난하게 하며,
하늘나라의 왕과 상속자가 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난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행복 선언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 가난할 때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소유하기 때문이지요.
가난이 이러한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살며
저세상 행복을 위해 소유를 포기하기 쉽지 않고,
저세상을 향해 떠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삶이 안정되면 될수록 더 떠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안정은 우리 인간이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고,
반대로 안정이 깨질까 또는 잃을까 두려워하는 불안은
우리 인간이 두려움과 함께 제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정되면 될수록 안주하게 되고 떠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집과 거처를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집과 거처를 포기할 때 우리는 가장 확실하게 가난할 수 있고,
나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도 천국에 가자고 초대하는
복음 선포의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하기에 우리도 주님과 프라치스코처럼
집과 거처를 포기하는 복음적 불안정을 일부러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정된 집과 거처를 포기하고 여기저기 떠도는 주님과 프란치스코를
사람들은 미쳤다고 하고 가족들은 그런 선택에 더더욱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미쳤다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거나 정신이 나간 것을 의미하지요.
세속의 눈으로 보면 주님과 프란치스코의 선택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정신이 나간 것이 맞는데 그것은 세속의 정신이 나간 것이고,
세속의 정신이 나간 대신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차린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주님과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 미친 분들입니다.
하느님께 미친 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미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개의치 않으시는 분들이 바로 주님과 프란치스코이고
우리는 그분들의 정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