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안드레아를 보십니다.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오늘 복음은 짧지만
두 번이나 '곧바로'라는 표현을 보여줍니다.
한 번은 시몬과 안드레아의 행동을 묘사하고
다른 한 번은 예수님의 행동을 묘사합니다.
이 단어는 어떤 일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그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시몬과 안드레아는
즉시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자
즉시 그들을 부르십니다.
두 행동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이 없는 것은
철저한 순명처럼 보이지만
생각이나 판단이 없는 무모한 행동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시몬과 안드레아의 경우
그물을 버리는 것은
생계를 포기하는 것을 뜻합니다.
평생 살아왔던 생계 수단을 버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자신을 맡깁니다.
예수님의 경우 당신이 가지신 신적 능력으로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자마자
그들을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비록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들을 알아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아의 경우를 다시 보자면
부르심의 순간은 선택의 순간입니다.
즉 선택의 순간에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신중한 선택을 위해서는
숙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두 제자의 모습을
우리 삶에도 적용하기에는
그래서 우리도 즉시 즉시 결정해야 한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사전은 '곧바로'라는 단어에
'다른 곳을 거치지 않고'라는
또 다른 의미를 덧붙입니다.
여러 어려움 때문에 즉시 결정하기는 어려워도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하나에만 집중해서 고민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그것보다 더 좋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선택의 순간에
소위 말하는 저울질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더 좋을까
저것이 더 나을까 고민합니다.
하나만 놓고 고민하기에도 벅찬데
둘 셋을 놓고 고민하기도 합니다.
고민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럴수록 하느님께 응답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문제는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것들을
우리가 점점 더 놓치지 쉽다는 것입니다.
고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선택을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민이라는 영리한 방법이
오히려 영리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