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사랑의 거울 앞에 서면 계산기가 사라집니다.
피정하는 시간은 깊이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나는 가끔 나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를 주관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집에서 떠나 한적한 장소를 찾아, 나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객관적으로 조용히 관계를 관망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예수께서도 분주한 일상을 떠나 한적한 장소를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자기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면 자기중심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만 맴돌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하느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는 시선, 그리고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의 시선을 생각하며 보내는 이 성찰의 시간이 나의 기도입니다. 회개하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 관계성 안에서 나를 내어주는 삶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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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믿음에 물줄기를 대주는 것,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나는 그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나의 자유는 사랑받고 있음에 대해 응답하기 위한 자유다.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이 믿음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응답하는 내용을 살피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따르라. 서로 사랑해라.”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관계 안에 나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놀라운 신비가 온몸을 감싸고 있음을 느낍니다.
조용히 머물러 내가 없이 바라봄으로써 나를 객관화하려는 이러한 시간은 고독한 시간이지만 하느님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머물러 기도하신 것은 아버지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없이 나를 바라본다는 말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거울에 나를 비춰봄으로써 나의 어둠을 밝힌다는 말입니다. 어둠은 빛에 의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라봄이 관상하는 마음이며 삼위일체 관계적 선에 참여하도록 끌어들이는 매력입니다. 이 매력에 끌리게 되면, 신비를 깨닫게 하는 내적 체험으로 보는 눈이 열리고 몸으로 아는 앎이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계산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계산기가 있습니다. 인과응보라는 틀에 하느님을 가두면서 스스로 거룩하고 의롭다고 하는 이들이 만든 계산기가 사후 처벌과 보상이라는 구원론으로 무장하여 개인의 삶을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오로지 상을 받기 위해서나 벌을 받지 않으려는 의도만 강조될 뿐,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의 실재가 관계 안에서 구체적으로 마련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인과응보의 계산기가 만든 관계의 단절은 복음의 반대편에서 통제와 지배의 칼로 자신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하여 애쓸 뿐입니다.
구원은 사랑받고 있음을 앎으로써 시작되고 내어주는 사랑으로 응답함으로써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 사랑 앞에 서면 계산기가 사라집니다. 무상성과 보편성이라는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가 나를 비추면 숨을 곳이 없습니다. 솜털처럼 부드럽고 온유한 자비, 푸근하고 편안한 품에서는 아무것도 계산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