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호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얘깁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이것은 우리 인생 얘기입니다.
우리 인생은 호수 이쪽 곧 이 세상에서 저쪽 곧 천상으로 가는 인생이지요.
그리고 가는 동안 큰 풍랑 곧 역경을 만나는 것 또한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에선 제자들만 건너는데
마르코복음에선 주님과 함께 건너는 것이 다행입니다.
흔히 인생살이는 고해를 건너는 것이라고 비유하는데
실로 얼마나 많은 인생이 주님 없이 바다를 건넙니까?
그러니 주님과 함께 건너는 것은 참 다행이지요.
그렇긴 한데 돌풍으로 배에 물이 가득 차
제자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주님께선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 또한 우리 신앙인들이 실제로 겪는 상황이지요.
우리가 죽게 되거나 큰 역경을 겪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주무시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실제로는 주무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함께 아니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요.
부재감(不在感).
어두운 밤.
하느님은 부재중(不在中)이 아니십니다.
부재중인 것처럼 우리가 느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어두운 밤과 부재감은 일시적이고 과정적이며
우리의 영적 체험과 은총 체험에 꼭 필요한 그래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두운 밤과 부재감이 일시적이고 과정적이라는 뜻은
마치 터널을 지나야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데 그 터널 통과의 느낌과 같고,
놀라운 광경을 보여 주기 위해서 잠시 눈을 가렸다가 보게 됨과 같습니다.
우리가 서프라이즈 파티를 할 때 종종 그러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은총이요 매 순간이 은총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늘 쉬는 숨이 은총이 아니고 늘 누는 오줌이 은총이 아닙니다.
일상이고,
일상적인 것은 당연한 것이지 은총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몸이 망가져 당연한 것이 아닌 체험을 하고 난 뒤에야
그것이 은총이라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고 체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주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무신다고 우리가 느낄 뿐입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니 계신다고 우리가 느낄 뿐입니다.
그래서 시편 121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를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고,
네 오른쪽 그늘이시기에 낮이면 해도 밤이면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시리라.”
우리도 이렇게 노래하는 시인들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