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다윗을 저주하라고 하시어 저자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어찌하여 네가 그런 짓을 하느냐?’ 하고 말할 수 있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우리는 하느님께 청하든 흠숭을 드리건 찬미를 드리건
우리가 뭘 하는 것쯤으로 기도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라면 기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대화라면 우리가 더 잘해야 할 것은 잘 듣는 것,
곧 경청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나는 일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른과 대화할 때 어른이 말씀하시면
말은 물론 하던 모든 동작 멈추고 공손히 듣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멈춤과 경청이 부족합니다.
가끔 젊은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기들끼리 그러하듯
제 앞에서도 휴대전화로 뭘 하는데 그때 저로서는 무척 당황스럽지요.
옛날 같으면 정 급한 일이 있으면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밖에 나가 용무 보고 돌아와서는 다시 경청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할 때 중요한 것은 경청인데
오늘 다윗은 그 경청에 있어서 우리의 모범입니다.
그는 시므이의 저주를 하느님 말씀으로 듣습니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인간을 통하여 하시는 하느님 말씀으로 듣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피하지 않고 맞듯
저주를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다 받을 수 있었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공손히 받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경청의 자세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모든 자연 재앙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경고를 듣고,
니네베의 왕과 백성들이 단식하고 회개했듯이
지금껏 하던 모든 것을 멈추고 바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행위에서도 하느님의 경고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므이의 말 안에서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관련한
하느님의 음성도 듣는데 이 또한 너무도 놀랍고 대단합니다.
그래서 그 반역은 아들이 지은 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들을 통해 내리신 벌입니다.
아들의 죄가 아니라 자기가 지은 죄의 벌이요,
하느님께서 가장 치명적인 방법으로 내리신 벌입니다.
그랬을 겁니다.
간음죄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아들이 죽은 것도 치명적인 벌이었는데
아들이 반역한 것은 틀림없이 그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죄를 자기가 받아야 할 벌로 받아들이고,
벌도 인간이 주는 벌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벌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공손한 기도 자세일 뿐 아니라 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한 짓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지만
하느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내리신 벌이라면 받아들이기 훨씬 수월하겠지요?
그래서 벌을 내리신 하느님께서 선도 내려주실 것을 기대할 수도 있게 되고,
그래서 이런 바람과 믿음으로 다윗은 이렇게까지도 얘기합니다.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벌을 주시는 하느님은 선을 은총을 주실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느님이 벌도 사랑으로 주시고 선도 은총으로 주시는 분입니다.
이러했기에 다윗은 성인이고,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고 우리의 모범입니다.
어제는 아무리 해도 제목만 올라가고
강론 내용이 올라가지 않아
몇 분에게만 이메일로 보내드렸는데
그것이 어제 강론 댓글에 올라와 있네요.
원하시는 분은 그것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가끔 이런 일이 있는데 저도 왜 그런지 모릅니다.
잘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