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1월 30일 화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5,27-28)
마음과 믿음으로 찾은 의사
밀물과 썰물에 출렁이는 바다도 온갖 상념에 뒤흔들리던 이 여인의 마음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의사들이 희망 없이 고생하고, 소용없는 약도 써 보고, 날마다 헛된 정성을 다 기울여 보았지만, 오래도록 치료에 실패하면서 전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었으니,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인간 지식이 고치지 못한 이 여인이 오직 믿음과 겸손으로 치유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수줍은 마음 가득한 이 여인은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율법이 ‘그 여자는 더러워질 것이며 거룩한 것을 만지지 말아야 한다’(참조 레위 12,4; 15,25)며 피 흘리는 여자를 더럽다고 규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종교 지도자들의 노여움을 사거나 율법의 단죄를 받을까봐 차마 그분을 만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 구설수에 오르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말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림들을 난처하게 하거나 그들의 귀를 거슬리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여인의 육신은 여러 해 동안 갖은 고생을 달고 살았습니다. 날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을 더 이상 참아 내기 어려웠건만, 주님은 그리도 빨리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생각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치유는 침묵하는 자에게도 주어지지 않고, 자신의 고통을 숨기는 이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상충하는 생각들 속에서 그 여인은 구원의 유일한 길을 찾아냈습니다.
치유를 훔치기로 한 것입니다. 존경심과 부끄러움 때문에 감히 청하지 못하는 바를 침묵 속에서 잡아채기로 한 것입니다. 육체로는 스스로 부당하다고 여긴 그 여인은 의사이신 분께 마음으로 다가가, 믿음으로 하느님께 손을 대었습니 다. 여인은 그분의 옷에 손을 대면서 이 도둑질에 치유와 용서가 내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 좋을 대로 한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청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도둑질로 얻은 것이 도둑맞은 분에게 어떠한 손해도 입히지 않는다는 것을 여인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 거룩한 도둑질은 믿음의 힘으로 이루어지며 … 믿음은 인간 기술이 스무 해 동안이나 실패를 거듭한 바로 그곳에서 치유를 낳습니다.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2
창조 –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물기
하느님이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안을 알 필요가 있다. 실로 하느님이 우리의 깊숙한 곳에 거주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엑카르트가 본 설교에서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우리는 기꺼이 그것을 전하고, 선포하고, 제시하고, 낳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의 의식은 두 마디 - 하느님과 피조물 - 를 생각하던 데에서 한마디, 곧 하느님을 생각하는 쪽으로 바뀔 것이다. 창조의 행위에서 볼 때, 창조적인 말씀은 한마디만을 입 밖에 냈을 뿐이다: 하느님은 끊임없이 한마디만을 말하고 있다. 그 한마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과 피조물이다: 이 한마디의 발언 속에서 그분은 아들을 말함과 동시에 성령과 모든 피조물을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창조된 것들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각기 다른 두 마디, 곧 하느님과 피조물로 알아듣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청각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단 한 마디를 알아들어야 한다. 우리는 한 번의 듣는 행위 속에서 피조물을 알아듣고, 창조주를 알아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피조물은 하나의 발언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신성의 표현, 일종의 신성이다. 우리는 이것을 설교 3과 4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적인 창조성과 우리 안에 있는 것의 신성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발설되고 있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놀람이라기보다는 복음의 경험일 것이다.(111)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월 4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요한 11-13장
<생태 영성 주간>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왕이신 예수님, 여왕이신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당신을 흠숭히나이다. 언젠가 당신의 다스림과 권능에 복종하게 될 모든 피조물과 함께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치시나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굴복되었다고 말할 때 모든 것을 그에게 굴복시키신 분이 제외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아드님께서도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코린 15,25-28)
왕이신 예수님, 이제 마리아와 함께 마음을 활짝 열고 당신의 권능 앞에 복종하나이다. 제 마음과 모든 천사와 성인을 다스리시듯 저를 온전히 다스리소서. 마리아님 당신은 저를 초대하여 오로지 주님께 마음을 두고 온 삶을 내맡기게 하시니 당신께 귀기울여 순종하겠나이다.
0 예수님, 당신께 저를 활짝 열어놓습니다. 제 마음을 다스리소서!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236)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