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시므이의 저주를 오지게 받고,
다윗은 자기의 불행을 하느님께서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라고 얘기한 바 있지요.
이렇게 선을 기대했는데 전장에서 소식을 알리는 사람이
압살롬의 전사 사실을 보고하며 마침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임금님께 맞서 일어난 자들의 손에서 오늘 임금님을 건져주셨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다윗에게?
이것이 기대한 선이겠습니까? 다윗에게?
압살롬이 원수요 적이었다면 이것이 기쁜 소식이었겠지요.
그러나 압살롬이 못된 짓을 아무리 했어도 다윗에게 그는
여전히 아들이었기에 그 소식은 너무도 비통한 소식일 뿐입니다.
사실 다윗은 애초부터 압살롬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과 전쟁을 벌였을지 모르지만
다윗은 전쟁한 것이 아니라 걸어온 전쟁을 막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전쟁에서 승리할 생각도 없었을 것이고,
그저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랐을 것이며,
아들이 죽는 그런 끔찍한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되고,
모든 것이 하느님 뜻대로 되기만을 바랐을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행복하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고,
그래서 뉘우치고 아들로 되돌아오기만을 바랐을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아비의 사랑이고,
이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들에게 한 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것과 같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하는 짓은 어쩌면 압살롬이 다윗에게 한 짓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로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가
때가 되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려고 하지 않고,
감히 하느님을 이겨 먹으려고까지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 공손히 하느님께 청하는 우리라고요?
얼핏 보면 우리는 청하는 존재고 하느님은 칼자루를 쥐신 분 맞습니다.
그러나 잘 보면 하느님 사랑의 약점을 이용해 먹는 우리입니다.
내 뜻을 안 들어주시면 언제고 탕자처럼 떠나기도 하고,
떠나지 않더라도 원망에다 분노와 떠나겠다는 협박까지,
모든 카드를 써서 어떻게든 내 뜻대로 하려고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내 맘대로 살아 곧 죄를 지어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마음 아픔.
이것은 사랑하는 이의 운명입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마음 아픕니다.
사랑하는 그의 아픔 때문에 마음 아프고,
사랑하는 그의 배신 때문에 마음 아프고,
배신 때문에 불행해질까 봐 마음 아프고,
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원하기에 마음 아픕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래도 압살롬보다 조금이라도 낫다면
이런 하느님의 사랑과 아픔을 조금이라도 알아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