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찾아오십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혼자 만나러 가시는 것이 걱정되는지
형제들이 같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아보고
며칠의 여행길을 거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만나리라고 생각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께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에게 부탁을 하고 기다리신 다음
듣게 되신 답은
한편으로는 예상 밖의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만나러 바로 나오시거나
적어도 기다려달라고 말이 나올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그 다음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전하고 싶은 것은
이번 일에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내용을
전하는 것이기에
그것에만 충실합니다.
우리는 오늘 마리아 신심 미사를 드리고 있기에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성모님의 관점에서
이 복음을 다시 한 번 읽으려고 합니다.
밖에 서 계시던 성모님은
그 대답을 듣고 어떻게 행동하셨을까요?
그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율법은 여성을 그리 존중하지는 않지만
어머니라는 관점에서는
아버지와 동등한 권리를 줍니다.
부모의 협력으로만 출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버지에게 효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말합니다.
성모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어머니께 잘 하시는
분이었을 것입니다.
즉 성모님을 모른채 하기 위해서
어머니와 관계를 끊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이
곧바로 이해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란 무엇인지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주어진 하느님의 뜻도 있지만
성모님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지
찾기 시작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혹은 멀리 계셔도
예수님의 공생활에 함께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은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입니다.
아니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무엇인가 명확하다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이
또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순간 순간 떠오르는 고민들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서 정해두셨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 뜻을 찾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 생활의 목표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복음환호송이 노래하듯
우리를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