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하느님 상(像)이 나의 삶을 바꿉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출발이 사랑의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인과응보의 계산기가 작동하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상(像)에서 배우지 않으면 내어주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상호 간에 내어주는 사랑의 신비를 모르면 하느님의 이미지는 홀로 존재하는 단순한 신의 이미지로만 인식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 아닌 절대권력을 가진 전능한 힘으로 사람의 죄를 심판하시는 무섭고 두려운 하느님으로 남게 됩니다. 인과응보로 철저하게 살아온 이들이 겪는 신앙의 위기는 참으로 처절합니다. 오로지 자기 능력에 따라 보상받고자 하느님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는 하느님 상(像)이 나의 삶을 바꿉니다.
벌주시는 하느님의 이미지에 물든 우리는 죄의 경중에 따라 상과 벌을 주는 심판하시는 하느님, 자신의 죄상을 낱낱이 파헤쳐 빈틈없는 정의를 요구하시는 하느님, 이러한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 하느님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행동의 동기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오로지 벌 받지 않기 위해서 살든지, 상을 받기 위해서만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 像은 인과응보의 논리로 사람이 만든 하느님과 반대되는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온갖 왜곡되고 제한된 하느님에 대한 개념들을 뚫고 내어주고 용서하는 사랑이 전부였습니다. 그분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와서 배우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사랑은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견디고, 기다리고, 용서하고, 허용하고, 놓아주는 영의 활동입니다. 전적으로 한 방향인 너에게로 흐르는 생명입니다. 측은한 마음과 너그러운 마음으로 관계를 돌보는 마음이며 거기서 발견된 영의 활동을 관상하는 신비로써 이미 누리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입니다. 우리가 내보이는 태도로 증명된 믿음의 실체입니다.
성숙하고 신비롭고 통합된 영성의 수준에 이르려면 지금까지 내가 믿었던 하느님을 청산해야 합니다. 왜곡되고 부당하고 독이 담겨있기까지 한 하느님 상을 허물어야 합니다. 착한 사람 상주고 악한 사람 벌주기 위해 명단을 작성하고, 지난날 나의 죄상을 기록하여 죄의 목록을 펼쳐놓고 옥좌에 앉아 심판하거나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아직도 그런 신에게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솔직하게 시인해야 합니다. 그런 이미지들은 어떠한 영성에도 바탕이 되지 않을뿐더러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관계를 관통하는 흐름 속에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높은 보좌에 앉아있는 노인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 이십니다. 마치 우리가 아직 멀리 있는데 달려와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루가15,20) 부모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이미지가 개인적으로 경험되기 전까지는 인과응보가 만든 하느님의 이미지 안에서 살다가 죽고 말 것입니다.
심판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라 할 수 있습니다. 압도적인 사랑의 거울 앞에서 자기 스스로 느끼는 충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밤새워 노력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 때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쳤더니 상상할 수 없는 물고기가 잡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가 주십시오” 이렇듯 거대하고 압도적인 사랑 앞에 섰을 때 느끼는 초라한 자기모습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 나에게 이루어집니다. 마침내 벌거벗은 나의 실상이 드러나서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거룩하신 주님의 영과 그 영의 활동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먼저 일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먼저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태도입니다.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태도가 우리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우리들이 관계 안에서 보여주는 태도만큼만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은 인과응보의 논리로 만든 하느님을 버리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내어주시는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믿음을 일깨워 주시는 분은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언제나 먼저 시작하시는 분은 육화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