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2월 11일 연중 6주일
고 도미니코 ofm
오늘 복음은 주님의 자비로운 마음과 깨끗함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만나 치유의 기적이 일어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에 따르면 나병은 전염되는 부정이며,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치유 되어 정화 예식을 거치기까지는 공동체와의 상종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병은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내리치시는 최고의 재앙이라고 여겨져졌습니다. 원칙적으로 보아 나병은 죄의 표시였습니다. 주님의 자비와 나병환자의 간절함의 동시적인 만남은 죄의 해방과 치유의 은총을 낳게 합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가 알에서 깨어날 때 새끼가 안에서 껍질을 쪼아대는 것을 啐(줄)이라고 하고, 어미새가 바깥에서 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합니다. 줄과 탁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새끼는 안에서 죽어버리기에 줄과 탁의 동시적인 행위로 인해 껍질이 깨지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합니다. 주님의 은총과 자비와 깨끗해지고자 하는 나병환자의 간절한 바람도 이 줄탁동시와 같습니다. 치유의 기적과 깨끗해짐을 위해 자신의 노력만을 믿어서도 않되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만 전적으로 의지해서도 않될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나병에 걸린 것보다 더 큰 것은 정신적 나병이었습니다. 치유받고자 하는 희망과 아무런 노력 없이 자신이 나병에 걸린 것에 대해 죄의식에 빠져 부모나 조상을 원망하며 고통과 비관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큰 나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2독서에서 사도바오로도 정신적 나병을 지닐 수도 있었습니다. 팔삭둥이었던 그는 놀림도 받고 자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유대교에서 개종했기에 변절자라는 수모를 받았을 것이고 교회를 박해했기에 더욱 그럴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진퇴양난의 정신적 나병의 상황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돌립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환란과 시련을 극복하자고 하는 강한 바람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인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하느님께 영광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정신적 나병의 상황을 디딤돌로 만들어 하느님의 영광으로 돌리며 그 영광속에 감추어진 하느님 사랑을 드러냅니다.
다음과 같은 초대교부의 숨은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수공예품을 팔기 위해 도시로 나온 아가톤 교부는 돌보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불쌍한 병자를 만나게 됩니다. 교부는 방을 하나 구하여 함께 지내면서 간호해 줍니다. 수중에 돈이 없었던 그는 자신이 만든 수공예품으로 방세를 대신 지불하였으며 병구완에 필요한 물건도 구입합니다. 그는 병자가 회복될 때까지 4개월 그곳에서 지내다 조용히 자기 거처로 돌아갑니다.
자신에게 정신적 나병의 상황이 닥쳐올 때 사도바오로가 어떻게 했는지를 상기하여 위기를 기회로, 걸림돌을 디딤돌로, 비관을 낙관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삼도록 합시다.
누군가가 정신적 나병이 걸려 힘들어 할 때 앞서 소개한 초대교부가 지녔던 사람의 마음으로 다가가 정성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함께 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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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2월 2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요한 19-21장 /마태 1-4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체성사를 위해 죽은 개종한 프로테스탄트
이탈리아-19세기
독일의 어느 한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인 아르투르(Arthur S.) 남작은 그 나라와 국민들을 알기 위하서 19세기에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성체성혈 대축일에 그는 리보르노(Livorno)에 도착하였고, 성체성사가 장엄하게 거행되는 데에 놀랐다.
전도시가 깃발과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기쁨의 종소리는 빛나는 태양 속으로 환호하듯 울려퍼졌다. 모든 집 창문에서는 꽃과 타오르는 촛불이 인사를 하였다.
리보르노의 대주교는 화려한 천개(天蓋) 아래서 황금으로된 성광을 들고 행렬 한가운데에서 걸어갔다. 수천의 관중들은 성스러운 성체에 경배하였다. 그러나 젊은 아르투르(Arthur S.) 남작만은 거만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고 성체의 형태 안에 계시는 구세주 하느님께서 가톨릭 신자들 옆을 지나가셨을 때 무릎을 꿇은 가톨릭 신자들을 조롱하면서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거만하던 자의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그의 조소하던 얼굴이 깊은 감명을 받은 얼굴로 변했고, 얼굴 위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얼어난 것인가? 왜 갑자기 아르투르 남작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을까 ?
그는 놀라고 있는 친구에게 자신의 경이스러운 체험을 몸소 이야기했다.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로 성체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갑자기 성광 안에서 이루말할 수 없이 온화하면서도 나무라시는 듯한 슬픈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구세주 하느님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내 마음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체 안에 실제로 계시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고서 나는 무릎을 꿇고 그분께 경배를 드렸어! "(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