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나병 환자가 주님께 와서 치유를 청해 치유 받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오늘 얘기의 주인공은 나병 환자와 주님 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나병 환자를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는 대단한 사람이고,
오늘 얘기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한 사람입니다.
우선 그의 신앙 고백이 우리의 모범입니다.
그는 주님 능력에 대한 믿음이 확고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주님 능력에 대한 믿음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께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일 뿐 아니라
하시고자 하는 의향도 있으신 분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 선의가 없으신 분, 사랑이 없으신 분이라고 믿었다면
주님께 나왔겠습니까? 애초에 주님께 나아오지 않았겠지요.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나병 환자가 사람들 가운데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이렇게 격리된 삶을 살아야 하고 그것을 어기고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면
사람들은 돌을 던져 죽일 수도 있었던 그런 사회 상황에서
그는 마치 겁이 없는 사람인 양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직진한 겁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을 때 주님만 보고 걸었을 때는
두려움이 없었고, 물에 빠지지도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사실 오늘 나병 환자에게는 병의 치유보다
두려움의 치유가 더 중요하고 값진 것이었을 겁니다.
육신의 치유보다 마음과 정신의 치유가 더 값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제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여러분은 육신의 병, 마음의 병, 정신병, 영혼의 병 곧 마귀 병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또는 선택의 순서를 정하라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순서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육신의 병을 선택할 것이고,
그다음이 마음의 병이요, 정신병과 마귀 병이 그다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가 이렇게 겁이 없이 나아올 수 있게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 대한 그의 믿음이지만 그의 믿음은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말에 믿음직한 사람이니 믿음이 가는 사람이니 믿음을 주는 사람이니 하는
말이 있는데 주님이야말로 믿음을 주는 분이십니다.
병자에 대한 구약의 그 차별과 격리와 단절의 법과 관습을 타파하시는
구별과 차별이 없는 주님의 사랑 곧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비와 빛을
주신다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주님의 파격적 가르침과 실천이 믿음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세 번째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들은 숨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과 같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병 환자가 주님께 나아올 때 막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병 환자를 피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고 아마 환대했을 겁니다.
오늘 병자의 날인데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라면
병자들이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지 않을 뿐 아니라
복음에서 많이 볼 수 있듯 병자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