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지혜가 모자라면 청하라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그럽게 베푸실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모자라고 청할 것이 지혜뿐이고,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 지혜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모자라는 것투성이고,
그러니 우리는 청할 것을 특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좋은 거라면 뭐든 청해도 되고 하느님께서는 너그럽게 주십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하느님께서 너그럽게 주신다고 하는데
이 말을 바꿔 이해하면 하느님은 은총의 하느님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청하고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신다고
그 은총이 다 우리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는 것인지,
그 은총이 진정한 은총이 되게 하려면 다시 말해서
은총을 완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것이 오늘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은총의 완성은 실천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 우리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게 하려면
주신 은총을 가지고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고 이것이 야고보서가
줄곧 주장하는 바이며 우리 가톨릭이 개신교와 달리 얘기하는 바입니다.
개신교가 비판하듯 우리의 실천과 공로가 있어야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실천과 공로가 은총의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의 실천은 주신 은총에 대한 합당한 노력입니다.
밥을 주십사 청하면 하느님은 밥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밥을 먹고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빈둥 놀면
그 밥은 우리의 힘이 되지 않고 살만 찌개하고 비만만 되게 할 뿐이지요.
밥이 우리의 힘이 되게 하려면 힘들어도 힘을 써야 합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힘들다는 말은 힘이 들어온다는 말인데,
밥이 힘이 되어 들어오게 하려면 힘들어도 힘을 쓸 때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는 인내 또는 인내력이 어떻게 생기는지 얘기하는데
그 골자는 시련 없이 인내는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말이기도 한데 너무도 당연한 말입니다.
인내라는 것이 본래 싫어하는 것, 고통, 시련을 견뎌내는 것이지,
좋아하는 것, 즐거움, 순탄함은 견디지 않고 그저 즐기고 누리는 법이지요.
요즘 인내하는 힘들이 갈수록 떨어집니다.
역경에 조금만 처해도 쉽게 Burn out이 됩니다.
Burn out을 우리말로 무기력증이라고 번역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풀어서 얘기하면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어느 순간,
심리적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고 육체적으로도 무기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렸을 때부터 역경을 적당히 견디는 힘을 길렀어야 하는데
자식을 너무 사랑하여 그 나이에 맞는 역경을 겪지 않아도 되게
부모가 과보호했고 역경을 피해 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역경을 견디고 이겨내는 힘이 세다고 하지요.
맞는 말이지만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아니, ‘과잉 사랑’을 받아
힘든 것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고 컸다면 그 사랑의 결과는
완성이 아니라 실패이고 밥을 먹고 힘든 일을 하지 않아 비만이 되듯
사랑도 비만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든 은총이든 많이 받았으면 많이 실천해야
사랑 비만 은총 비만이 되지 않고 완성될 것입니다.
내일부터 17일 토요일까지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돌아와서 기쁘게 다시 만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