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청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마음에는
어떤 마음이 함께 있는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보여달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직은 믿기 어려운데
내가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 달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신앙 생활은
불확실함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 전체가 불확실함 속에 있기에
당연한 모습처럼 보입니다.
불확실함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그 경우들을 모두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피곤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확신을 갖고 싶고
확신하기 위한 표징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일련의 과정은
굉장히 이성적이며 논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약점이 있습니다.
믿음이나 확신이
내가 아닌 남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증거를 보여달라',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 달라' 요구하는 것에는
증거를 주는 것에 따라
확신시켜주는 사람에 따라
내 믿음이 움직입니다.
믿기 위해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능동적인 행동인데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수동적인 행동입니다.
즉 내가 믿는 것인데
표징을 통한 믿음은
믿게 되는 것입니다.
믿기 위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그 표징으로 내가 믿겠다는 것인데
표징을 요구하는 것 안에는
주체적인 내가 없습니다.
둘은 서로 모순됩니다.
더 나아가 그 증거가 진실이라고
100% 확신할 수도 없습니다.
그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조차도
일말의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증거를 제시하는 사람을 믿을 수 있어야
그 증거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표징을 요구하는 마음은
믿음의 문제로 돌아오게 됩니다.
즉 표징을 요구하는 마음 뒤에는
'그러니까 나는 믿지 않을 것이야'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믿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위해 이성적으로 찾아가는 과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믿음이
함께 해야합니다.
이 둘의 균형을 맞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디까지 고민하고 의심하고
어디부터는 믿을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선은
믿음과 이성이 둘 다 필요하다는 것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 할 때
우리는 서서히 그 균형점을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