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비유는 보통 탕자의 비유라고 하는데
실은 자비의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자비가 주제이고
그래서 자비의 하느님 비유가 제목으로 맞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비유에 나오는 세 사람을
소설이나 영화의 캐릭터 보듯 하나하나 다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비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캐릭터입니다.
작은아들은 눈치나 상황을 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추구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굴곡 많은 캐릭터입니다.
큰아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과 요구되는 역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모범생이기에 굴곡은 없지만 억울한 캐릭터입니다.
먼저 아버지의 자비는 큰아들에게보다는 작은아들에게 잘 나타납니다.
왜냐면 자비는 사랑 중에서도 죄인에 대한 은총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미사 때마다 통회의 기도 다음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자비송을 바치고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큰 죄를 지은 작은아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그는 은총의 사랑인 자비를 받습니다.
반면 큰 죄를 짓지 않은, 아니, 어쩌면 아무 죄도 짓지 않은 큰아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또 늘 아버지 사랑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그는 은총의 사랑인 아버지의 자비를 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고 동생처럼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한 억울함,
동생처럼 방탕하게 살지 못한 억울함을 아버지에게 토로합니다.
이런 그에게 아버지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는 그 말을 제대로 잘 이해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 사랑에서 박차고 나날 용기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버지 사랑을 늘 느끼지도 못했으며,
아버지 사랑 안으로 달려들지도 못해 억울한데,
그런 그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입니다.
어쨌거나 아버지에게 큰아들은 애처롭고 안타깝기만 하지만
작은아들은 기쁨 곧 잃었던 아들을 되찾는 기쁨을 드립니다.
오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자기 몫을 챙겨 떠나는 작은아들을 붙잡지 않습니다.
강제로라도 자기 곁에 묶어두지 않고 자유롭게 떠나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이 자유로 인간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을 떠나는 죄를 짓지만
이 자유로 하느님 사랑을 선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큰 죄인인 우리를 자비로이 받아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해야 하지만
그 위험한 자유를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더 큰 사랑에
더 감사케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