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저는 성경 말씀 이해에 있어서 의구심이 들 때마다
여러 성경을 다 뒤지고 개신교 성경도 봅니다.
이번에는 “과연”이라는 말과 “이제”라는 말 때문에 성경들을 봤습니다.
가톨릭 성경들은 다 “과연”이라는 말을 넣어 번역을 하였지만
개신교 성경에는 이 말이 빠져 있고
영어 성경도 딱히 이 말에 해당하는 말이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과연” 그리고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
이전에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하느님의 자녀라는 느낌이 있고,
전에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었는데
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과연 사자 새끼’, 또는 ‘과연 진돗개 새끼’라고 하면
그동안 봤을 땐 비리비리하여 도무지 사자와 진돗개다움이 없었는데
사냥을 하는 걸 보니 사자나 진돗개다울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리고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때
우리도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자녀인 것일까요?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그런 뜻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그리스도와 같이 순결해야지 하느님의 자녀이지
하는 짓이 악마와 같으면 하느님의 자녀라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돌아가신 우리 수사님이 형제들에게 종종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람보고 사람, 사람 하는데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사람이지.”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에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됨됨이나 행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느님의 자녀이지
그렇지 않으면 악마의 행실을 닮은 악마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됨됨이와 행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기에
하느님의 자녀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 서간의 뒷부분은
우리의 됨됨이와 행실이 예수를 닮아야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음을 얘기하는데 비해
앞부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은
우리가 잘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 (태어)나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난 것은 우리가 잘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그리고 그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이것이 잘 살아나지 않는데
영어를 보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은 밋밋한 사랑이 아닙니다.
“Think of the love that the Father has lavished on us"
성부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퍼부어주신 사랑을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아낌없이 그리고 넘치도록 퍼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어찌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을 수 있겠냐는 뜻이지요.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보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하는 하늘의 소리가 있었는데,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들이니
예수님처럼 살므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라는,
그런 뜻이 오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저는 성경 말씀 이해에 있어서 의구심이 들 때마다
여러 성경을 다 뒤지고 개신교 성경도 봅니다.
이번에는 “과연”이라는 말과 “이제”라는 말 때문에 성경들을 봤습니다.
가톨릭 성경들은 다 “과연”이라는 말을 넣어 번역을 하였지만
개신교 성경에는 이 말이 빠져 있고
영어 성경도 딱히 이 말에 해당하는 말이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과연” 그리고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
이전에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하느님의 자녀라는 느낌이 있고,
전에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었는데
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과연 사자 새끼’, 또는 ‘과연 진돗개 새끼’라고 하면
그동안 봤을 땐 비리비리하여 도무지 사자와 진돗개다움이 없었는데
사냥을 하는 걸 보니 사자나 진돗개다울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리고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때
우리도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자녀인 것일까요?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그런 뜻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그리스도와 같이 순결해야지 하느님의 자녀이지
하는 짓이 악마와 같으면 하느님의 자녀라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돌아가신 우리 수사님이 형제들에게 종종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람보고 사람, 사람 하는데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사람이지.”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에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됨됨이나 행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느님의 자녀이지
그렇지 않으면 악마의 행실을 닮은 악마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됨됨이와 행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기에
하느님의 자녀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 서간의 뒷부분은
우리의 됨됨이와 행실이 예수를 닮아야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음을 얘기하는데 비해
앞부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은
우리가 잘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 (태어)나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난 것은 우리가 잘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그리고 그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이것이 잘 살아나지 않는데
영어를 보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은 밋밋한 사랑이 아닙니다.
“Think of the love that the Father has lavished on us"
성부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퍼부어주신 사랑을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아낌없이 그리고 넘치도록 퍼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어찌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을 수 있겠냐는 뜻이지요.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보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하는 하늘의 소리가 있었는데,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들이니
예수님처럼 살므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라는,
그런 뜻이 오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