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오늘 이 말씀에서 ‘그러나’라는 말이 눈에 쏙 들어오며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그러나’는 앞의 얘기와는 반전을 예고하는 표현이지요.
앞에서는 헛수고, 헛고생을 얘기하다가
그건 그렇지만은 않다고 얘기하는 것이지요.
무엇이 어떻게 그렇지만은 않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은 나를 버리지만 하느님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나의 일과 노력은 인간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헛수고가 되겠지만
영적으로는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영광이 될 것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의 헛수고는 두 가지입니다.
일의 실패와 관계의 실패입니다.
보통은 공들인 일이 아무 성과가 없을 때 헛수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지 않았을 때 그렇게 얘기하지요.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는 이 헛수고의 기준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결과가 나지 않은 것으로,
그러니까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지 않을 때 헛수고인 것으로 바꿔야.
그러니 우리 신앙인은 내가 원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다를 때
그렇게 애쓴 것이 헛수고가 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고, 어떤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땐 하느님 뜻과 달라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 곧 주님의 헛수고는 일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실패,
그러니까 제자 교육의 실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자식 농사의 실패입니다.
3년 동안 당신의 제자요 하느님 포도밭의 일꾼으로 그렇게 애써 키웠는데
유다 이스카리옷은 당신을 팔아넘기고 다른 제자들은 다 배반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아주 심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토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처럼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어서 터뜨리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 심란하심이 우리와 같은 의미의 심란하심일까요?
물론 좌절감 곧 제자 교육이 내 뜻대로 안 된 것의 심란하심이 아니라
사랑의 심란하심 곧 제자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이해해야겠지요.
우리만 해도 자식 농사가 잘되지 않았을 때
내 뜻대로 안 된 것 때문에 심란하지 않고,
자식이 불행할까 봐 심란하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이제 주님은 제자들의 배반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당신이 죽어갈 때 제자들은 요한 외에 아무도 당신 곁에 없을 겁니다.
그럴지라도 당신 곁에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다며,
당신의 죽음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그리고 제자들도 지금은 배반하지만
나중에는 참 제자로 바뀔 것이라며 심란하심을 추스르십니다.
‘그러나’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을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이 됩시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