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4월 4일 목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루카 24,41-42)
순교자들의 믿음을 나타내는 구운 생선
그들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눈으로 그분을 보고 손으로 만졌지만 그래도 믿어지지가 않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엄청난 은총을 받았습니까? 손으로 만지지도 눈으로 보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믿으니까요! 그들이 너무 기쁜 나머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그들은 자기네한테 있는 것, 곧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습니다. 구운 물고기는 불로 입증된 믿음, 곧 순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한 토막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3). 순교자의 온전한 몸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이는 사랑 때문에 고난당하고 어떤 이는 교만 때문에 고난당합니다. 교만 토막을 치우고 사랑 토막을 내어 놓으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음식입니다. 그리스도께 그분의 몫을 드리십시오. 그리스도는 사랑 때문에 고난당하는 순교자들을 사랑하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세 번째 사랑은 신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을 알기 위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이 사랑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내재를 받아들인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낳는다. 이 사랑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이 영원 전부터 외아들을 낳았고, 지금도 낳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낳으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린 영혼, 곧 내재하는 하느님을 받아들인 선한 영혼 안에서 하느님은 아들을 낳는다. 그것은 신적인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적이고, 낳음을 지향하고, 하느님이 자기를 인식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하느님에게 충만한 기쁨을 주고, 우리가 함께 나눌 만한 사랑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이 존재의 원 안에 있는 피조물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이 원의 중심점은 창조주다. 신적 사랑과 에너지에 더 온전히 참여하고자 하는 존재는 원둘레의 여러 점처럼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피조물들은 이 원의 중심을 향해 더 깊이 나가도록 초대받는다. 이 원의 중심에서 신적인 사랑이 방출되기 때문이다. 원의 중심으로 나가는 이 여정은 올라가는 여정이 아니라 가라앉는 여정이다. 가서, 너 자신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라. 가라앉음의 여정은 어디에서 끝나는가? 존재의 원초적 근원에서 끝난다고 엑카르트는 말한다. 우리가 중앙으로 가라앉는 것은 모든 존재의 원초적 근원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그것은 맑고 투명하게 비치는 하느님에게로 뛰어드는 것이다.(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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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제5주간 생태 회심 주간
<금주간 성서 읽기> 요한 1서 전체
<생태 회심 주간> 생태적 묵상
목요일 성모님의 날
프란치스코의 주님 성탄과 피조물
하느님의 성인은 부제(副察)였으므로 부제복을 차려입고 거룩한 복음을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면서도 부드러웠고, 맑고 낭랑하였으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최고의 선물을 받게 했다. 그는 둘레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그는 가난한 임금님의 탄생과 작은 마을 베들레햄에 관하여 재미나게 말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부르고 싶을 때면 사랑에 불타서 그분을 “베들레헴의 아기”라고 부르곤 하였고, “베들레헴”이라는 말을 할 때의 그의 목소리는 마치 어린 양의 울음소리 같았다. 그의 입은 말로써 보다는 차라리 감미로운 사랑으로 채워져 있는 형편이었다. 그뿐 아니라 “베들레헴 아기”나 “예수”라는 말을 할 때, 그의 혀는 이 말의 감미로움에 입맛을 다시고 입술을 핥으며 맛과 향기를 맛보는 듯하였다. 전능하신 분의 은총이 그곳에 충만하였고, 그 자리에 있던 어떤 한 덕이 있는 사람들은 놀라운 환시를 보았다. 그는 어린 아기가 말구유에 생명없이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이 다가가서 마치 잠에서 깨어나게 하듯 그 아기를 소생시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형제여, 우리를 위하여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신 이 날을 단식일이라고 하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 날은 담벼락까지도 고기를 먹여야 합니다. 그런데 먹일 수가 없으니, 그 곁에다가 고기를 문지르기라도 해야 합니다"
이 날에 프란치스코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 주기를 바랐고, 소나 당나귀까지도 평상시보다 더 많은 양의 여물을 주게 하였다. 그가 말하였다. “내가 황제께 말만 할 수 있다면, 그에게 이야기해서 포고를 이렇게 내리라고 하겠소. 모든 사람이 밀과 곡식을 길에다 뿌려서 새들도 이렇게 성대한 날은 실컷 먹게 하고 특히 나의 자매들인 종달새들이 실컷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말입니다”
-첼라노가 전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