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간음한 여인 (1805)
작가: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 1757-1827)
크기 : 켐퍼스 유채 : 35.5X 35.7cm)
소재지 : 미국 보스턴(Boston) 미술관
작가는 영국의 낭만주의 문학 시대를 연 시인으로 런던의 가난한 노동자의 가정에 태어나 왕립 미술 학교를 잠시 다닌 것 외에 거의 독학으로 공부 했는데, 14세 때에 판화가의 제자가 되면서 화가로서의 기량을 키우게 되었다.
특히 그는 중세기 영국을 풍미했던 고딕 대성당 건축에서 대단한 영감을 받았다.
고딕 대성당의 양식적인 면보다는 고딕 성당 내부의 ‘감동적인 힘’과 고딕 조각에서 느껴지는 영적인 에너지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즉 그는 고딕 양식의 하늘을 향한 끝없는 비상의 상징적인 특징과 고딕 성당 외부의 그로테스크한 조각물을 통해서 상상력에 호소하는 미술 작품의 전형을 배우게 되었다.
또한 시인과 예술가로서 작가의 인생과 예술에 영향을 준 원천은 성경, 영국 시인 밀턴(Milton)과 신곡의 저자인 단테( Dante)의 영향을 받아 당시 유행하던 합리주의에서 낭만주의로 이행하는 시대적 분위기 창출에 극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가 성경을 자기 삶의 원천으로 여기며 밀턴과 단테와 같은 크리스챤 작가들의 작품에 심취했으나 시인과 화가로서의 그의 삶의 태도는 제도적인 교회의 가르침의 경계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그는 제도화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는데, 교회가 제도화 되면 어쩔 수 없이 복음이 제도를 지키기 위한 방편 수준으로 전락되면서 더 이상 예수님의 정신을 실천하기 보다 형식적 과시적 외침으로 그치기 쉽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예술가들은 제도적 교회가 만든 전통과 신조에서 방법에서 해방되었을 때 ,교회의 한계점을 보완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예언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작가의 성서 해석 역시 제도적 교회의 교리 수준 이상으로 영원을 담보한 예술의 정신적 가치 표현에 큰 의미를 두고 ,이것이 예술이 지닌 사명으로 여겼기에 그의 작품은 다른 예술가들이 줄 수 없었던 매력과 감동을 주고 있다.
작가는 초상화나 풍경화처럼 단지 자연에 대한 외관을 복사하는 회화를 경멸했으며 ,신비와 공상으로 얽힌 신비로운 작품 경향으로 다른 작가들이 표현하지 못했던 부분을 과감히 드러냄으로서 새로운 화풍을 창출했다.
이 작품은 요한 복음 8장1- 11절에 있는 “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 대한 것이다.
당시 교회 지도급 인사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데리고 와서 이 여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예수님의 의견을 물었다
그 여자를 용서해야 한다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고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울 수 있고 , 그 여자를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면 하느님의 계명인 사랑과 용서의 가르침과 반대되기에 주님 스스로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올가미를 씌울 계산이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시자 주님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혈안이었던 지도자들이 하나씩 둘씩 떠나게 되었다.
그 여자와 예수님만 남았을 때
주님께서는 “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 간단한 교훈을 주시며 그 여인을 용서하셨다는 내용이다.
작품은 주님께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시자 이것을 읽은 바리사이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지면서 주님과 그 여인만이 남아있는 장면이다.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서 떠나는 바리사이의 다양한 모습의 옷차림과 어두운 색상은 그들의 순수하지 못하고 음험한 내적 세계의 위선적인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겉으로 그들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선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들의 내면은 위선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과 같음을 성서는 누누이 전하고 있는데 작가 역시 이 관점을 강조하고 있다.
성서에 나타난 주님은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위선적인 태도와 전혀 다른 혁명적인 가르침으로 당시 교회가 금과옥조로 여기던 많은 규칙을 시원히 파괴하신 분이시었다.
사람을 대하는 규칙, 식탁에서의 규칙을 파괴하셔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식탁에 초대하셨고 이것 때문에 주님은 기성 종교 지도자들의 많은 반대와 박해를 받으셔야 했으나 그분은 초지일관하셨다.
주님은 모든 인간적인 약함에 대해서는 더 없이 관대하시며 파격적인 용서로 처신하셨으나 위선자에 대해선 너무도 준엄하고 날카롭게 대하셨는데 작가도 예민한 감수성을 이 장면에서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지켜라 .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 마태오 23: 3)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 ”(마태오: 7:5 ).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 마태오 : 23:23)
예수님의 이 준엄한 질책은 성서에 나타난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일 뿐 아니라 제도적 교회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는 모습이기에 작가는 자신이 몸담은 현실적 교회에 경종을 주는 차원도 포함시키고 있다.
바리사이들이 물러간 자리에 예수님과 여인만 남아 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해선 준엄하셨으나
죄를 뉘우치는 죄인에 대해선 더 없이 관대하셨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오 5, 28)
죄는 악한 것이지만
죄인은 약한 심성의 원인으로 죄에 빠지게 되기에 그가 뉘우치기만 하면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셨다
예수님은 악함과 약함을, 죄와 죄인을 분명히 구분하신 분이시며 작가는 이 관점을 바리사이와 다른 색상으로 표현하면서 예술가로서의 신앙적 감수성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의 성서에 대한 이해 역시 나름대로의 감성안에서 소화했으며 , 이것이 작품에서도 드러나게 된다.
이런 관점은 신학자들이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을 예술가들이 표현하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작가는 마귀의 존재를 인간 정신이 정도를 벗어난 상태로 보았기에, 여기에 등장하는 파리사이는 주님을 반대하는 나쁜 사람 수준이 아니라 악마적 차원에 이른다는 표현을 등을 돌린 음습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외면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면에서 바리사이들과 동질성이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작가는 예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모습으로 바리사이를 등장시키면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형제의 상징으로 죄녀를 격상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죄녀는 예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죄녀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좋은 형제 자매임을 파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주었다.” (요한 15:15 )
그의 작품은 성서의 장면이나 내용을 복사하는 형태의 전통적인 성화의 관점의 접근이 표현하지 못한 성서의 깊은 내면을 표현하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이 줄 수 있는 색다른 영감과 참신한 생명력을 선사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특별한 예술적 신념 표현으로 인간다운 삶을 갈망하는 많은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다.
지난 세기 불운한 처지의 사생아로 태어나 끝없는 호기심과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도전정신으로 애플 신화를 창출했던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생각이 막힐 때 항상 블레이크의 시집을 꺼내 읽으면서 마음을 정화시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