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은 뭔가 이상하고 어색합니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주님이라고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우리도 그럽니다.
우리도 주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주님이라고 합니다.
누구를 주님이라고 하면 그는 나의 주인님이라는 뜻이고,
나를 좌우하는 분이라고 인정하는 것인데,
그런 주님을 잘 모른다니,
그리고 모르면서 주님께 나를 좌우하시도록 맡긴다니 이상하지요.
아무튼 주님과 우리 사이는 알면서도 모르는 사이이고,
모르는데도 맡기는 사이입니다.
주님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주님이라는 것은 알기 때문이고,
이것이 앎을 넘어서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잘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주님을 다 알 수는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인간 마음속도 다 모르는데 어떻게 주님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믿는데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
다 알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다 모르기에 믿고,
다는 모르지만 주님이라는 것은 알기에 믿는 것이기 때문이고
주님은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겸손으로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상 우리가 모르는 것은 없습니다.
다 알지는 못해도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은 “있어도 없는 것”이고,
객관적으로는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뭣이건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은 없고
누구건 무엇을 다 알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많이 알고 적게 알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많이 알고도 잘 모른다고 하는 겸손한 사람과
조금 알고도 다 안다고 하는 교만한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사람은 믿지도 않고 묻지도 않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믿을 수 없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조금 아는 것이 주님의 전부이니 어찌 주님으로 믿을 수 있고,
다 아니 주님께 물을 게 무엇 있겠습니까?
이에 비해 겸손한 사람은 믿지만 묻고,
묻지만 의탁합니다.
잘 모르지만 주님은 너무 대단하시니 믿지 않을 수 없고,
조금 알지만 모르는 것이 더 많으니 묻지 않을 수 없으며,
묻기는 하지만 믿기에 의탁합니다.
겸손한 자의 물음은 결코 의심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더 알기 위해 묻는 것이고,
더 사랑하기 위해 묻는 것이며,
더 순종하기 위해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교만에서 겸손으로 돌아섬이요,
바오로 사도의 물음은 겸손과 사랑의 질문입니다.
당신은 제게 누구시오며
저는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은 뭔가 이상하고 어색합니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주님이라고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우리도 그럽니다.
우리도 주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주님이라고 합니다.
누구를 주님이라고 하면 그는 나의 주인님이라는 뜻이고,
나를 좌우하는 분이라고 인정하는 것인데,
그런 주님을 잘 모른다니,
그리고 모르면서 주님께 나를 좌우하시도록 맡긴다니 이상하지요.
아무튼 주님과 우리 사이는 알면서도 모르는 사이이고,
모르는데도 맡기는 사이입니다.
주님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주님이라는 것은 알기 때문이고,
이것이 앎을 넘어서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잘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주님을 다 알 수는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인간 마음속도 다 모르는데 어떻게 주님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믿는데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
다 알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다 모르기에 믿고,
다는 모르지만 주님이라는 것은 알기에 믿는 것이기 때문이고
주님은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겸손으로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상 우리가 모르는 것은 없습니다.
다 알지는 못해도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은 “있어도 없는 것”이고,
객관적으로는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뭣이건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은 없고
누구건 무엇을 다 알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많이 알고 적게 알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많이 알고도 잘 모른다고 하는 겸손한 사람과
조금 알고도 다 안다고 하는 교만한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사람은 믿지도 않고 묻지도 않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믿을 수 없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조금 아는 것이 주님의 전부이니 어찌 주님으로 믿을 수 있고,
다 아니 주님께 물을 게 무엇 있겠습니까?
이에 비해 겸손한 사람은 믿지만 묻고,
묻지만 의탁합니다.
잘 모르지만 주님은 너무 대단하시니 믿지 않을 수 없고,
조금 알지만 모르는 것이 더 많으니 묻지 않을 수 없으며,
묻기는 하지만 믿기에 의탁합니다.
겸손한 자의 물음은 결코 의심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더 알기 위해 묻는 것이고,
더 사랑하기 위해 묻는 것이며,
더 순종하기 위해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교만에서 겸손으로 돌아섬이요,
바오로 사도의 물음은 겸손과 사랑의 질문입니다.
당신은 제게 누구시오며
저는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