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는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유대교 신자가 결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구약성서가 훌륭하고 그 성서가 얘기하는 하느님이
저의 신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해도 유대교 신자는 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이 되지 않겠다는 뜻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극단적인 선민사상과 시오니즘의 유대인과 유대교는 글러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뽑으신 것은
이사야서가 얘기하듯 모든 민족을 당신께 모아들이기 위해서인데
잘못된 선민사상과 시오니즘의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하느님의 백성이고,
다른 족속은 하느님 백성이 아니기에 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것이 드러난 것이 어제 사도행전의 얘기입니다.
베드로가 할례받지 않은 이들과 식사를 한 것을 두고 비난을 한 것 말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어제 이런 말씀들로 아주 적절한 대처를 하였지요.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올바른 유대교는 같은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민수기 11장을 보면 비슷한 얘기가 있습니다.
엘닷과 메닷은 70인 장로가 아니고 그리고 만남의 장막 밖에 있었는데도,
다시 말해서 만남의 장막 안에 장로들과 같이 있지 않았는데도
주님의 영을 받았고 그래서 여호수아가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자
모세는 그것을 질투해서는 안 된다고 한 다음
차라리 모든 사람이 주님의 영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제 베드로 사도도 같은 맥락으로 사람들의 말문을 막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의 의젓하고도 올바른 대처 덕분에
그리고 이 말은 들은 사람들의 동의 덕분에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 갇히지 않고 그리스도교가 될 수 있었는데
오늘 사도행전은 초대 공동체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되는 과정을 얘기합니다.
스테파노의 박해로 흩어진 이들이 안티오키아의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말씀을 전합니다.
이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 사도들의 교회가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파견하고,
바르나바는 타르수스로 가 사울을 데리고 와 같이 말씀을 전하는데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라고
오늘 사도행전은 전합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봅니다.
흩어져 안티오키아에 간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고
그리스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여전히 유대교로 머물러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를 극복한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문을 우리가 나만 또는 우리만 드나드는 문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의 문을 열어야 하고 닫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교황님께서 동성 커풀을 비전례적으로 그러니까 사목적으로 축복하는 것을
허용하신 것 때문에 비판과 반대를 하거나 혼란을 겪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 의미는 축복을 청하는 이들에게는
누구에게나 교회가 열려있어야 하고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결합이 정상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축복을 청하는데도 너희들은 비정상적이기에 축복해줄 수 없다고,
반대로 너희들은 축복 대신 저주받아야 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합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결합을 전례적으로 축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원하고 청하는 사람을 사목적으로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하라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그리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며 좋다고 축복하신 피조물을 누구도
축복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우리는 이해의 폭을 넓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