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렇게 단언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보면 모든 것을 보며 하느님도 볼 수 있다.
이것이 관상이고 관상적 차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관상한다고 하면 하느님 관상만 생각합니다.
사람을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상을 이렇게 이해한 사람은 하느님을 관상하기 위해
인간을 자기 시야에서 어떻게 해서든 몰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저희 프란치스칸에게 이런 관상은 진정한 관상이 아니고,
그래서 이렇게 관상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진정한 관상은 하느님과 인간과 피조물을 모두 보는 것이고,
인간과 피조물을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인간과 피조물을 봅니다.
관상이 이런 것이고 또 이럴 수 있는데 사람들은 왜
하느님만 보려 하고 인간은 시야에서 몰아내려고 합니까?
또 피조물을 통해서는 하느님을 보려고 하고 보는데
왜 인간을 통해서는 보려 하지 않고 또 보지도 못합니까?
두 가지 이유입니다.
인간은 꼴 보기 싫기 때문이거나 진정한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싫거나 미울 때 꼴 보기 싫다고 하잖습니까?
꼴 보기 싫으니 시야에서 어떻게 해서든 치워버리려고 하지요.
그러니까 하느님은 사랑하기에 관상하겠다고 하면서
인간은 꼴 보기 싫으니 관상에서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상이 성공하겠습니까?
꼴 보기 싫은 인간 때문에 관상이 매번 실패할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자리 잡고 앉기만 하면 그 인간이 떠올라
하느님께는 그 언저리에도 못 가고 끝이 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 없이 관상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사랑 없이 관상하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데
믿음 없이 관상하려는 것도 마찬가지로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이 세상에서 볼 수 없고,
삼라만상이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우주와 인간을 그렇게 많이 연구하지만
무기물질로부터 생명체가 우연히 생겨나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생겨났다고 믿으면서 물질세계 이외의 다른 실재를 부정하는데
이런 믿음을 가지고 초월적 실재인 하느님 관상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이들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은 계신다고 믿고
하느님은 모든 것의 창조자라고 믿으며,
그래서 삼라만상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하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관상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만 보는 믿음과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도 보는 믿음 가운데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선택을 요구받는 오늘 우리이고,
사랑과 믿음 없인 어떤 관상도 꿈꾸지 말아야 함을 가르침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