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하느님에 대하여 또 사랑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선언이랄까 말을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이라고 요한이 얘기하는데
제 생각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존재는 사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다만 그 사랑이 매우 작거나 크거나 차이가 있고,
사랑의 수준이 낮거나 높거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가족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나라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민족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자기 종교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을 사랑할 수 없어 동물이나 사랑하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이것보다는 수준이 높아 휴머니즘적인 인류 사랑을 추구하지만
아직 하느님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랑도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서로 사랑’이고,
그래서 저는 오늘 나눔의 주제를 이렇게 잡았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서로 사랑’
풀어서 얘기하면 위에서 오는 사랑을 받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수직적 사랑과 수평적 사랑이 잘 조화를 이루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곧 위로부터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야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권고를 온전히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사도행전의 얘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어떤 차별도 하지 않고,
어떤 배제도 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렇게 벽을 허물 때 성령께서 임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성령을 사랑의 성령이라고 하고,
“오소서 성령이여” 라고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차별도 배제도 없는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하려면
위에서 오는 성령의 사랑 없이는 할 수가 없는데
위에서 오는 성령을 받기 위해선 우리가 열어야 합니다.
성령의 오심과 우리의 엶이 상호작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냄비의 뚜껑을 열지 않고 국을 받으려고 하거나
창의 커튼을 열지 않고 햇빛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되듯,
그리고 물동이도 없이 내리는 비를 받으려 해선 안 되듯,
우리를 여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주머니를 여는 것보다
나를 여는 것임을 다시 한번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