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5월 10일 금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 16,21)
순교자들의 생일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여자가 기뻐하듯이, 믿는 이들의 무리가 장차 올 세상 안으로 태어날 때 교회도 그 여자처럼 기뻐하며 환호합니다. 교회는 그들이 태어나도록 현세의 시기에 수고하고 크게 신음하며, 출산하는 여인처럼 근심합니다. 사람이 이승에서 떠나는 것을 탄생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머니 태에서 나와 여기 지상의 빛 속으로 오는 것을 ‘태어난다’고 통례적으로 표현하듯이, 사람이 육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빛 속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을 ‘태어난다’고 표현하는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된 순교자나 고백자가 세상을 떠난 날을 그들의 생일로 부르며, 그들의 축일을 ‘장례일’이 아니라 ‘생일’로 표현하는 관례를 따릅니다.
-존자 베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은 새로운 성전이다.
엑카르트가 데카르트 학파도 아니고, 합리주의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게 중요하다. 하느님의 성전인 지성은 뇌의 한쪽, 곧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쪽도 아니고, 학문적 각주의 영역도 아니다. 쉬르만이 지적한 대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개념, 곧 맨스(mens)라는 개념은 “알고 사랑하는 근본적인 기질이며,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생명의 영적인 혼적이다. 이런 이유로 쉬르만은 지성이라는 말보다 “영”이라는 말을 더 좋은 말로 꼽는다. 여기서 말하는 지성은 “직감적으로 아는 내적인 앓”이다. 그것은 직관적인 지성이지 추론적인 지성이 아니다. 카푸토는 이렇게 말한다. “엑카르트가 ‘지성의 작은 불꽃’을 말할 때, 그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결론으로 나가는 추론 능력, 개념을 사용하는 추론 능력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엑카르트는 “다른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능력, 곧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하고 고귀한 능력”을 말한다. 이 능력이야말로 “자유의 바탕”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선과 존재가 벗겨진 모습 그대로 파악한다. 선은 하느님이 자신을 감추기 위해 입는 옷이지만”, 직관적인 지성은 그러한 매개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지성의 이 바탕에서 사람은 근본부터가 신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신적인 불꽃과 접촉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비우거나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일치를 알게 될 것이다 .(167)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5월 1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20-23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세례를 받은 사람은 새로운 생활 자세를 취해야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이고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할 어리석은 대화를 하지 맙시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으로 새롭게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이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합하게 살아서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일입니다. 여러분은 명예로운 의회의 의원 자리를 얻기 위해 행하는 의회 의원들의 그 큰 노력을 보지 않습니까? 이들은 일반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행할 수 있는 것도 의회 의원이기에 하지 말도록 정해진 법을 철저하게 지켜 갑니다.
막 세례를 받았거나 이전에 이미 세례의 은총을 받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한 번 세례를 받음으로써 영적 의회의 의원이 된 우리는 세속 의회의 의원들이 하는 것과 같이 열성적으로 노력하여, 말하는 것에 있어서 조심하고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순수한 것을 증명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의 영혼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하지 말기를 권합니다.
혀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성서를 해설하며 영적 대화를 하는 데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으로 제가 의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에페 4,29).(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