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십계명을 다 지켰다는 어떤 부자의 답에 대견해하십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계명을 잘 지켜왔다는 점에서도 이 부자가 대견하지만
제 생각에 더 대견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 질문한 것입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잘 살아왔을 뿐 아니라 미래 그것도
영원한 미래에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에는 이 부자의 나이가 나오지 않지만
마태오 복음에는 젊은이로 나오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부자는 젊은데도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저나 웬만큼 산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하고 그리 대견하다 할 것이 못 되겠지만
앞으로 살날이 창창한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벌써 관심이 있으니 대단하지요?
어제 저는 계획된 연수회가 취소되는 바람에
오랜만에 걷는 월 피정을 할 수 있었는데 걸으면서
오늘 부자 청년의 이 질문과 함께 내내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자주 저 자신에게도 또 다른 분에게도 던지는 질문,
이렇게 계속 가면 그 끝이 어떻게 될 것 같은지에 대한 질문을 또 던졌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잘 산 것이 중요하지 않고 앞으로 잘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아무리 잘 살았어도 앞으로 잘못 살면 다 헛것입니다.
지금까지 아주 잘못 살았어도 앞으로 잘 살면 그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계속 가면 나의 끝이 어떻게 될지 물어야 합니다.
노망난 늙은이로 살다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요?
지지난 주, 제가 매주 미사 드리러 가던 수녀원의 수녀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제가 그 장례미사를 주례했는데 제가 처음 수녀님을 만난 7년 전,
암 수술을 하신 이래로 수녀님은 병치레를 내내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병과 싸우셨습니다.
병을 이겨내려고 무척 애쓰셨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병과 싸우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셨겠지만,
차츰 벗으로 그리고 천국 여정의 반려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작년 말 종부성사를 청하셔서 종부성사를 드릴 때는
거의 성녀가 되어 계셨고 이미 아버지 하느님 앞에 계셨습니다.
앞에서 노망난 늙은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노망이란 것이 늙어 망령부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망령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망령이란 영이 흐려진 것이고
정신이 제정신이 아닌 겁니다.
일생으로 수도자로 살았어도 수도자답지 않게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을 못 견뎌 하고 이 세상 생명에 대한 애착이 큽니다.
수도자의 정신이 흐려지거나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의 끝은 무엇일까? 노망일까 성덕일까?
초대하시는 주님을 끝까지 잘 따를까? 돌아설까?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이런 질문을 얼마나 자주 던지며 살아가시나요?
한 번도 던져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닌가요?
아! 그런데 제가 너무 무례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드렸군요.
그랬다면 용서하시고 제 의도는 그것이 아님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