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의 축일을 지낼 때마다 부끄럽고 괴롭습니다.
육신은 편한데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죽었는데 저는 죽지 않으니 말입니다.
요즘 우리는 자기 목숨을 내놓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자기 목숨을 내놓지 않으니 자기(Ego)를 죽이지 않으며,
자기를 죽이지 않으니 자기 살자고 남을 죽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목숨을 내놓지 않고도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지금이
옛날 우리 선조들의 신앙생활보다 더 복되다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실은 육신은 죽어도 영혼이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그리고 신앙인이란 이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성인들 특히 순교 성인들은 그것을 완성한 분들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런데 순교 성인들은 그것을 완성한 분들일 뿐 아니라 모범입니다.
오늘 독서 마카베오서의 엘아자르는 이런 순교의 모범입니다.
율법이 금한 돼지고기 대신 먹어도 되는 다른 고기를 먹으면
살려주겠다고 책임자들이 제의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하지요.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내 자신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또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
자신만을 위해서라면 눈을 한 번 질끈 감아도 될 것입니다.
나는 순교할 마음이 있고 또 순교의 용기를 이미 보였다고 합리화해도 됩니다.
사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 보면 그래도 됩니다.
나의 믿음을 하느님께서 다 아실 터이니 말입니다.
입으론 배교 해도 마음이 그렇지 않다면 말입니다.
얼마 전 일본에 합동평의회 때문에 갔을 때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일본 순교 성지를 순례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영화로도 만들어진
엔도 슈사꾸의 그 유명한 소설 <침묵>의 배경이 되었던 곳도 방문했지요.
이 책을 저는 고등학교 때 처음 읽었는데
기억에 강하게 남은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후미에 밟기입니다.
후미에 밟기란 배교의 표시로 성상이나 십자가 등을 밟게 한 것인데
배교하지 않으면 신자들을 죽임으로써 이웃 사랑의 배교와 순교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선택을 강요하는 고문 방식이었지요.
이때 주인공인 신부는 이웃 사랑을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이라면
이웃 사랑을 위해 당신 얼굴을 밟으라고 하실 것이라고 믿고 후미에를 밟지요.
이때 주인공인 신부는 주님의 이런 말씀을 마음속으로 듣는 듯하였습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도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아무튼 겉으론 후미에를 밟아도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믿으면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래서 배교 해도 되지만 순교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믿는 이들에게 모범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순교의 세 번째 이유는 증거입니다.
순교가 다른 믿는 이들에게는 모범이 되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는 이들에게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증거 하는 것이 순교라는 말입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담대하게 죽을 수 있는 저 죽음은 무엇이고,
죽어가면서도 행복해하는 저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증거 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믿음이란 육신은 죽어도 영혼이 사는 것이 행복임을 믿는 것인데
순교란 자신에게는 이 믿음의 완성이요,
다른 믿는 이들에게는 믿음의 모범이며,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믿음의 증거임을 순교자들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