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6월 5일 수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르 12,25)
영적 동반자
우리는 그들(사별한 배우자들)과 더욱 확실히 결합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승화된 차원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고, 영적 동반자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우리 자신이 누구에게 속하는지 알게 될 것입 니다.
만일 우리 안에 이 관계에 대한 감각과 기억이 없다면, 어떻게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영원히 찬미 노래를 불러 드릴 수 있겠습니까? 또 우리가 의식 없이 육적으로만 변화된다면 어찌 찬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며, 하나가 될 것입니다(참조 요한 17,11.21; 갈라 3,28). 비록 상급은 다를지라도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습니다(요한 14,2 참조). 모든 이가 이미 합의한 품값인 한 데나리온(참조; 마태 20,10; l코린 3,8), 곧 영원한 생명을 받기로 하고 일했지만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덧없는 이승의 삶에서도 부부가 갈라서는 것을 금하셨으니, 당신 몸소 맺어 주신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 안에서 결코 갈라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신적인 씨앗은 우리 안에 들어 있다. 여느 씨앗이 그러하듯이, 신적인 씨앗도 자라야 한다.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 안에 들어 있습니다. 어질고 슬기롭고 부지런한 농부를 만났을 경우, 그 씨앗은 튼튼하게 자라서 하느님이 될 것입니다. 그 열매는 하느님의 본성과 똑같을 것입니다. 배나무 씨앗은 자라서 배나무가 되고, 개암나무 씨앗은 자라서 개암나무가 되고, 하느님의 씨앗은 자라서 하느님이 됩니다.”
이 씨앗, 곧 하느님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오른다.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거나 덮어 버릴 때도 그것은 꺼지지 않는다. 엑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를 오리게네스에게서 빌려 온다.
“하느님께서 몸소 이 씨앗을 뿌리시고, 꽂으시고, 낳으셨습니다. 비록 떠밀리고, 감추어지고, 한 번도 경작된 적이 없다고 해도, 이 씨앗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라고, 반짝이고, 빛을 발하고, 타오를 것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하느님께로 발걸음할 것입니다.”(181)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6월 1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마르 7,24-37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5절: 십자군 운동
제 1차 십자군(1096∼1099):
제 1차 십자군의 성과는 그리스도교적인 예루살렘 왕국의 건설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본보기를 따라, 십자군 참가자들의 더 작은 국가들인 안티오키아 후작령과 에데사와 트리폴리 백작령과 더불어 봉건국가로 조직되었다. 부이용의 고드프롸가 최초의 “성묘 수호자”로 선출되었다.
그는 1099년에 아스칼론 부근에서 이집트의 술탄을 정복하였다. 그의 동생 발두인 1세 (1100)∼1118)가 그의 뒤를 이었는데, 그는 예루살렘 그리스도인의 왕이라고 자칭하였다. 앙주의 풀고(1131∼1143) 때에는 이 왕국의 영토가 최대로 확장되었다.
제 2차 십자군(1147∼1149):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특히 이 십자군의 성립을 권고하였고, 프랑스 국왕과 독일 국왕 콘라트 3세를 여기에 가담하도록 하였다. 그것은 독일 • 프랑스군의 무서운 파국으로 끝났는데, 그들은 여러 번의 전투에서 터키인들에 의하여 전멸되었다. 1187년에 예루살렘을 다시 잃었다.
제 3차 십자군(1182∼1192):
성도를 다시 탈환하기 위하여 강력하고 잘 조직되고 무장된 거대한 십자군이 프리드리히 적발제의 인솔하에 동방으로 출발하였다. 이 군대는 이코니움 부근에서 터키인을 물리치고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연로한 황제가 1190년에 살레프에서 익사하자 지휘자를 잃은 군대는 더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영국의 리처드 사자심왕과 프량스 왕 필리프 2세는 예루살렘을 다시 정복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192년에 술탄 살라딘과 휴전을 맺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 순례자들의 평화적인 예루살렘 방문은 보증되었다.
제 4차 십자군(1202-1204):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이 원정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전 서구의 그리스도교계가 마지막으로 이 계획을 위하여 하나로 뭉쳤다. 그러나 이 원정은 교황의 뜻을 완전히 거스르고, 베네치아 상인들의 이기적인 상업상의 관심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유도되어 비잔틴의 내정 분규에 간섭하게 되었다. 이 도시의 최초의 정복(1203. 7 .17) 후에 협정된 그리스 교회와 라틴 교회의 재일치가 지켜지지 않았을 때 두번째의 정복(1204.4.13)이 있었고, 이때 이 도시가 무섭게 약탈되고 황폐화되었다. 이른바 라탄 제국이 이곳에 설립되었는데, 이 국가는 1261년까지 존속되었다.
이같이 난폭하고 무책임한 행동은 동서 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회복시킬 수 없게 만들었다. 일치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