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내 마음 몰라.’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합니다.
‘당신은 모르실 거야. 얼마나 사랑하는지.’라는 유행가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모른다고 솔직히 말했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텐데 안다는 식으로 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당신은 내 맘 몰라라고 말하면
그때 우리는 모르긴 왜 몰라라고 하곤 하지요.
그렇습니다. 알긴 압니다.
문제는 얼마나 아는가이고, 사실 다 알진 못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마음의 상처는 이렇게 내 마음을 몰라줄 때 받고,
제 생각에 이 상처가 욕먹을 때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욕이나 모욕은 인격적 상처이기에 마음의 상처보다 더 크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욕이나 모욕은 내가 잘못하거나 부족해서 받는 것이라면
마음의 상처는 나의 잘못이 없는데도 나의 사랑이
무시당하거나 배신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상처를 더 많이 받기 십상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 마음은 어떻습니까?
우리처럼 상처받으시는 마음일까요?
주님의 마음은 더 크고 많은 사랑을 하셨기에 더 큰 상처를 받으셨고,
그래서 그런 주님의 마음도 상처받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성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마음과 하느님 사랑은 얼마나 큽니까?
그 마음과 사랑을 우리가 얼마나 알겠습니까?
마음이 넓다고 할 때 하해(河海), 곧 큰 강과 바다와 같이 넓다고 하는데
주님의 마음은 우리가 최대라고 생각하는 그 하해보다 넓고,
우리의 앎을 늘 뛰어넘기에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해보다 큰마음이기에 상처받아도 받지 않으십니다.
접시의 물은 작은 돌에도 온통 뒤집히지만
바다의 물은 큰 돌이 떨어져도 한 번 풍덩하고 그만일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도 이것과 같을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우리가 너무 몰라주고 무시해도
주님은 그것으로 치명상 입지 않으시고 그래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래서 그런 사랑을 우리는 거룩하다고 합니다.
최후 만찬 복음은 주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우리 마음은 작기에 작은 사랑을 조금 하고도 큰 사랑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것을 몰라줄 때 상처를 크게 받고 주는 족족 많이 받습니다.
그러니 상처를 준다고 남 탓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옹졸함을 탓해야 하고,
우리 마음의 그릇을 크게 키워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기도하면 될까요?
물론 기도해야 합니다.
몰라줘도 더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노력하면서.
이때 ‘더’는 더 큰 사랑을 더 계속하는 겁니다.
더 큰 사랑 의지와 노력에 주님께서 은총을 주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기도하듯이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버지께서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우리 마음이 주님 마음과 같게 되기를 바라고 기도할 뿐 아니라
노력하기도 다짐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