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연중 제10주일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면서
저는 ‘누구와 싸울 것인가?’, ‘무엇과 싸울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나는 정작 싸워야 할 것과는 싸우지 않고
괜히 엉뚱한 것을 붙잡고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과의 두려운 만남을 앞두고
형과 싸우기보다 하느님과 씨름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느님과 싸우고 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에
우리는 엉뚱하게 다른 사람의 소소한 잘못을 놓고 싸우곤 하지요.
우리 인생은 남의 잘못이나 갖고 싸울 정도로 한가하지 않습니다.
먼저 내 안의 악과 싸우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급선무(急先務).
급선무란 급하고 앞서는 일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우리는 급선무 식별과 급선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 발이 썩어들어가고 있으면 그것부터 고치는 일이 급선무이지
그 발로 산티아고 걷는 꿈이나 꾸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 한가한 짓이고
남의 눈의 티나 빼주겠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 엉뚱한 짓을 하는 거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급선무를 놔두고 한가하고 엉뚱한 짓을 하는 걸까요?
그것은 지난 수요일 강론에서 말씀드렸듯이 비겁함의 영 때문이고,
자신의 죄와 악과 직면한다는 것이 두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요일 강론을 요약해 옮기면 이렇습니다.
비겁(卑怯)이라는 한자어를 그대로 뜻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비란 비천이나 노비라고 할 때의 ‘천함’과 ‘천민’의 뜻이고
겁이란 ‘겁나다/두려워하다’, ‘약하다’, ‘피하다’는 뜻으로서
비천하고 약하기에 두려워하고 두려운 것을 피하는 겁니다.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 감기조차 두려워하듯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고통을 두려워하고,
약한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악한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죄의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합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두려워하는 사람은 피하는데
그 피하는 방법 곧 회피의 방법이 다양합니다.
그 첫 번째가 자기 부정입니다.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죄와 악의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이 두려워
일단은 자기는 그런 자기가 아니라고 자기 부정을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경우,
그런 자신에 대한 핑계를 대거나 변명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합리화 또는 정당화하는 것인데
오늘 독서에서 보듯 아담과 하와가 한 짓이 바로 이것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이런 존재였다면 제2의 하와는 그 반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이 들렸다는 소문을 듣고는
마리아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온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주님은 악령이 들린 분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신 분이시고 악령과 맞서 싸우신 분이시지요.
그리고 마리아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성령의 정배요 주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지요.
이런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성령의 정배가 되고
주님의 어머니가 되라고 초대하시고,
새로운 하와가 되어 안과 밖의 악령과 맞서 싸우라고 하십니다.
거듭 말하지만 나와 싸우는 것이 제일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그래서 나와 싸우지 않고 남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와 싸우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들어 남과 싸운다면
쩨쩨하게 나와 마찬가지로 약한 인간을 악하다고 하며 싸우지 말고
야곱처럼 하느님과 싸우고 주님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아 악령과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자기 안의 악과 싸우는 것이 영적으로 제일 강한 것입니다.
자기 안의 육의 정신과 싸우는 것이 제일 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