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는 수도회를 두 번이나 옮겼습니다.
이것은 매우 부정적인 평가의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있는 곳에 만족치 못하고 부적응한 변덕의 결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수도회를 두 번이나 옮긴 것은
변덕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성덕과 열성 때문이었습니다.
더 잘살아보려는 거룩한 원의 곧 뜻에 따라 옮긴 것으로
그뿐 아니라 성인들 가운데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그의 뜻이었다면 그의 뜻이 아닌 것이 그의 일생에 더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일생은 뜻하지 않은 일이 많았던 한 생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한 생을 요약하면
뜻하지 않았던 한 생인데
하느님 뜻이었던 한 생입니다.
자기 뜻에 따라 작은형제회 회원이 되었고,
자기 뜻에 따라 모로코로 순교하러 갔지만
그의 뜻은 병으로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 병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고향 포르투갈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 배는 풍랑으로 인해 고향이 아니라 이탈리아로 갑니다.
이 풍랑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곳에서 조용히 은수자로 살고자 하였는데
참석한 서품식 강론자에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안토니오가 강론하게 됐고 이로 인해 설교자가 됩니다.
이 갑작스러운 일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아무튼 그가 뜻하지 않은 하느님의 뜻 때문에
설교자가 되고, 관구장도 되고, 프란치스칸 최초의 신학 교수가 되었는데
그 이후 그의 삶은 서른여섯의 짧지만, 불꽃 같은 삶이었습니다.
흔히 열병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불에 타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설교가요 신학자였지만 오늘 지혜서의 말씀처럼
기도에서 얻은 지혜로 설교하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나는 기도를 올려서 지혜를 받았고, 하느님께 간청하여 지혜의 정신을 얻었다.
나는 지혜를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지 않았다.
이제 그것을 아낌없이 주겠다."
이것은 또한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신학 교수직을 허락하며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나의 주교 안토니오 형제에게 프란치스코 형제가 인사합니다.
수도 규칙에 담겨 있는 대로, 신학 연구로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면,
그대가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은 나의 마음에 듭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렇습니다.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았고,
그 영의 불이 활활 타올랐으며 그래서 기도의 영으로 가르치고,
헌신의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를 ‘뛰어난 설교가’요 ‘곤경 중의 전구자’로 인정합니다.
지금 치면 대학자가 강단에만 서지 않고 서민들 가운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 뜻이면 가리지 않고 무엇이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게는 너무도 존경스럽고 닮고 싶은 것인데 여러분에겐 어떻습니까?
내가 뜻하지 않은 그러나 하느님께서 뜻하신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는 것을 안토니오에게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