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열왕기는 그 유명한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의 하느님 체험에 앞선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르멜산에서 거짓 예언자들과 1:450으로 목숨을 건 싸움을 하였고,
이때 엘리야는 그들을 다 쳐 죽였는데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로 그는 왕비 이제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래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와 동굴에 숨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지냈는지 모르지만, 그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동굴 속에는 그만 있으라는 말씀이고
나와서 산 위로 오르라는 말씀이며,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라는 말씀입니다.
동굴은 엘리야가 택한 피신처였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그에게 피신처는 주님이어야 했는데,
이제벨에게 쫓겨 두려움에 싸인 그는 겨우 동굴을 피신처 삼았던 것입니다.
이 모습은 요즘 모든 사람이 두렵고 자기 가족마저 두려워
자기 방에 콕 박혀있는 은둔형 외톨이 모습인데
대 예언자라는 엘리야가 어떻게 이렇게 초라합니까?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이제벨에게 쫓기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것입니까?
있어야 할 주님 앞에 있지 않은 것입니까?
주님을 보지 않고 이제벨을 본 것이고,
주님 앞에 있지 않고 두려움 가운데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을 보지 않고 주님 앞에 있지 않으면 다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풍랑을 만나서 주님만 보고 물 위를 걸었을 때는 아무 두려움이 없었고,
그래서 아무런 문제 없이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는데
잠깐 시선을 놓친 순간 그 두려운 물을 보는 순간 물속에 빠진 것과 같은 거지요.
그러니 신앙인에게 두려움은 하느님을 보지 않아 생기는 두려움이고,
힘없는 자기를 보고 자기를 둘러싼 두려운 것들을 보기에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대 예언자 엘리야도 이러니 우리는 더 그리고 수시로 이럽니다.
잠깐 하느님을 놓치는 순간 사람들이 다 두렵고 두려움에 숨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거기서 나와 당신 앞에 서라고 주님 말씀하시는데
그러나 여전히 동굴 밖은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로 두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다 지나고 난 뒤에야 가까스로 나온 엘리야에게
주님께서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던지시는 질문이지요.
이에 우리는 ‘무엇을 하긴요?’
‘아무것도 못 하고 있지요!’ 이렇게밖에 대답 못하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길을 돌려 다마스쿠스 광야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거든 임금을 세우고 예언자를 세워라.”
두려워 도망치던 길에서 돌아서라는 말씀이고,
사명을 수행하러 가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임금들을 세우고
같이 일할 동료와 후계자들을 세우라는 명령입니다.
“가서 무너져가는 내 집을 고쳐라.”라고 프란치스코가 받은 명령과 같습니다.
구세력이 두려운 사람은 도망치고 숨을 것입니다.
구세력이 싫고 미운 사람은 그것을 때려 부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과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 안에 신세력을 형성할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엄청난 사명을 수행하려면 하느님 체험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하느님 체험은 좋지만
엄청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하느님을 체험해야 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원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