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고
말씀하십니다.
작기 때문에
잘 보지 않으면
씨앗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향,
자신들이 생각하는 온갖 좋은 모습을
그것에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누구나 그것을 선택하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꿈꿀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비추어서 보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을 때
막상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는 사람,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적을 것 같습니다.
작기 때문에 잘 보아야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 나라와
실제의 하느님 나라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하느님 나라를 찾는다면
나의 기준이 나의 눈을 가려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꿈꾸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은
하느님 나라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화려하지 않은 곳에도
하느님 나라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
하느님과 함께있는 곳이기에
단적으로 표현해서
화려하지만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은
하느님 나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화려하지 않지만
고통이 끊이지 않고
어둠 만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곳에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면
바로 그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지금의 삶이 힘들기에
하느님 나라를 꿈꾸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상황을 딛고 일어날
희망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 생각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시각을 조금은 더 넓혔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우리 곁에 계시는 하느님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나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지금의 어려움은 무조건 벗어나야 할 상황이 아니라
또 다른 하느님 나라의 모습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하느님 나라에 동참할 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화려한 하느님 나라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