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 성심(Sacred Heart of Jesus)
작가 : 젠 노턴 (Jen Norton)
크기 : 아크릴
소재지 : 개인 소장
가톨릭 전례는 참으로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 성령 강림후 즉시 삼위일체 대축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그리고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전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최후 만찬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신 성찬례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기에 성찬례를 기억하게 만든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바로 성찬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가없는 사랑의 마음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교회는 이것을 미사 때 마다 성서에 나타나는 내용인 다음 기도문으로 표현하고 있다.
“스스로 원하신 수난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 줄 내 몸이다.
저녁을 잡수시고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다시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가 미사에 참석하는 것은 바로 성찬에 대한 기억을 통해 예수님의 가없이 큰 사랑을 확인하고 체험하기 위한 것이다 .
그런데 이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어떤 예수 성심에 대한 기적과 연관된 신심이 등장하면서 성찬례를 떠나 예수님의 초상에 불타는 심장을 강조하는 성심상이 전파되고 요한 복음에 드러나는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장면의 장엄함이 예수님의 성체성사를 더 풍요롭게 표현하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2-34)
예수성심 공경은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신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가치를 강조하던 탁발 수도자들의 영성에서 태동했다.
이것을 실천했던 분들로는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성 보나벤뚜라, 성녀 마틸다와 성녀 젤뜨루다, 성 대 알베르토 또 및 성녀 가타리나 등을 꼽을 수 있으며 또한 이를 공적 예절로 발전시킨 데는 성 요한 에우데스(St. Jo-hn Budes, 1601~1680)와 성녀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콕(St. Margaret Mary Alacoque, 1647~1690)의 공이 컸다.
이 작품을 제작한 작가 역시 예수 성심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체험할 수 있는 성품을 지닌채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무척 수줍음을 많이 타서 가족들 외에는 폭넓은 관계를 가지기 어려운 처지에서 오직 그림 그리는 것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특별한 성격이어서 그의 예술 활동은 단순한 자기 계발의 단계가 아닌 외부 세계를 향한 삶의 호흡과도 같은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예술적 표현이 그의 유일한 인간간의 친교의 길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예술을 공부하는 것이 세상과 다른 사람들과 가장 효과적인 친교의 길이라 여기게 되어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했다. 한마디로 예술이 어떤 기능적인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닌 작가의 심성으로 세상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되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실리콘 벨리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다가 드디어 그녀의 꿈이었던 순수 예술로 발길을 돌리게 되고 가톨릭 신자로서 그의 신앙의 바탕에서 예술을 다루게 되었다.
그는 예수회 교육을 받았기에 예수회 영성의 특징인 세상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란 신앙의 태도로 작품활동을 했기에 삶의 평범한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했다.
치유자로서 어머니처럼 인간을 안아 주고 격려하는 존재로서의 하느님 표현에 노력하다 보니 다른 성화에서 볼 수 있는 초자연적인 숭엄함이나 신비감 보다 우리 주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현실안에서 만날 수 있는 종교적 분위기 표현에 더 의미를 두었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체득한 가톨릭 신앙의 전통적인 주제들을 일상의 삶안에서 표현했다.
그의 종교성은 철저히 현실 체험안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모습 역시 전통적인 성화처럼 세상과 벗어난 하늘의 존재가 아니라 일상의 삶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다정하고 생기있는 모습으로 표현 했다.
성찬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사랑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일 마다 참석하는 성찬례를 통해 체험 되는 것임을 알리면서 성찬례 거행이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다는 면에서 현실적으로 얼마나 체험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예수 성심 공경을 어떤 신비 체험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교회가 거행하는 성찬례에서 찾았는데, 이것은 신자들이 일상의 삶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너무도 실감있게 체험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성찬례가 교회안에서 십계명의 준수의 필수 요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장 친근한 존재로 만날 수 있는 사랑의 체험임을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성심 공경이 성찬례와 별개의 기적으로 이어지는 신비체험이 되고 나면 예수님의 삶은 이 세상 삶에서 유리된 어떤 허상의 존재에 대한 환상적 믿음으로 둔갑할 수 있으며 오늘 우리 신자들 대종에서 드러나고 있는 현실과 유리된 어떤 이상적 삶에의 그리움 수준에 표현에 머물 수 있다.
위의 왼편은 여느 인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성탄 사화에서도 그분이 구세주이심을 표현하기 위해 천사가 동원되는 등 이색적인 분위기를 강조했으나 여기에서는 너무도 평범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른편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표현하고 있으나 이것 역시 드라마틱한 고통이나 승리의 전조와는 무관하게 일상 삶의 한부분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체험이 가능하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일상의 삶안에서 신앙의 내용이 심화된 삶을 표현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한 생명 체험 역시 매일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삶의 생명 체험이다. 잡 근처에 있는 조그만 공원을 거닐면서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평범한 자연의 한 부분은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대지처럼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신앙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전통적 종교화에서 표현하던 상징의 도입이나 기교도 없이 자신의 세상과의 유일한 교통의 효과적인 도구로 여긴 예술을 통해 가톨릭 신앙의 핵심인 성찬례를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임을 통해 성심 공경은 일상의 삶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인간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삶을 사랑하고 체험하는 것임을 전하고 있다.
그러기에 미사는 참석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 무슨 법적인 관계가 아니라 우리가 가슴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인간적인 자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죄의 용서와 공로쌓기로 이어지는 신앙은 생기가 없는 형식이 되기 쉽고 현실과 유리된 삶의 영역에 신자들을 묶어 둘 수 있으며 오늘 교회가 여기에서 탈출을 강조해야 할 중요한 부분을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성찬례가 가장 현실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다정한 관계이면서도 천상적 감미로움을 예수 성심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천상과 지상의 만남이라는 가톨릭 신앙의 멋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 표현 역시 어떤 기교를 사용함이 없이 어린이의 작품처럼 유치하리 만큼 순수하게 보이는 것은 다른 세련된 작품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성심공경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이 작품의 대범성은 먼저 작가가 그동안 예수 성심 공경을 어떤 신비 체험으로 여기던 것에서 끌어내서 성체 성사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과 직결시킴으로서 예수 성심의 진면모를 신자들의 성체 배령(聖體拜領)과 미사 참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만든 것이 큰 공로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