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6월 20일 목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마태 6,7)
말 많은 기도와 단순한 기도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루카 18,9-14)는 말 많은 기도와 겸손하고 단순한 기도가 얼마나 다른지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말 많고 자신을 추켜세우는 바리사이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겸손히 죄를 갚이 뉘우치며 자기죄를 용서해 주기를 청하는 세리는 제 자랑하는 바리사이보다 더 의로움을 인정받았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집회 35,21), 기도하는 이의 청을 들어주실 준비가 되어 계신 하느님께 도달한다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아퀼레이아의 크로마티우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엑카르트가 영혼과 육체에 대하여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물리쳤다는 증거를 찾아보자. 성서를 기록한 유대교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영혼과 영과 육체를 구분한다. 그는 영혼과 영을 지나치게 동일시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영혼과 육체가 경쟁을 벌인다고 떠벌리지도 않는다. 육체와 영혼에 대하여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은 궁극적으로 영혼은 영이고, 육체는 영이 아니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엑카르트는 이와 다르게 생각한다. 그는 영의 존재와 영혼의 존재를 구별한다. ”바울로 사도의 육체는 끌어올려져 그의 영혼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영적 존재도 끌어올려져 그 영혼의 존재에게로 돌아갔다." 육체와 영은 영혼을 향한다.
육체의 방향과 영의 방향은 상호 배타적인 방향이 절대 아니다.
“내가 쓰는 영혼이라는 말은 다음의 사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영혼은 육체에 생명을 줍니다. 영혼은 육체의 형식입니다. 만일 영혼이라는 말이 영(spirit)으로 불린다면, 영혼이라는 말은 새로운 말로 바뀌어야 마땅합니다. 영혼이 영으로 불리는 까닭은, 그것이 지금 여기와 자연의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은 하느님의 형상이고, 하느님처럼 이름이 없습니다. 영혼은 새로운 낱말로 바뀌어야 할 필요를 알지 못하며, 하느님처럼 영원만을 알 따름입니다.” 29(189)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6월 3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마르 14-16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항상 깨어 있으라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파티마의 세 목동의 공적을 일일이 비교하여 발현 때 프란치스코의 역할이 두 소녀만 못하여 뒷전에 가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또 귀부인께서 직접 말씀을 건넨 적도 없고 히야친따처럼 정겨운 목소리를 듣는 은총도 받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프란치스코가 제일 뒤졌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이 언제든지 우리 공로의 보답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 그리고 약간의 증언을 위해 꼭 귀부인의 음성을 들어야만 되는 것일까? 소년에게는 자신을 위해 마련된 천국의 아름다움을 깨닫기 위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이 아닐까?
성모 마리아께서는 두 소녀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이신 것처럼 프란치스코에게도 나타내 보이셨다. 그리고 성모님은 제일 먼저 소년을 맞아들이셨다. 이것은 소년이 선택받은 성인들 중에 끼는 데 가장 적당하고 천국에 가서 하느님을 직접 뵙고 즐기는 데 넉넉한 준비를 갖추었다고 인정하셨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미 말해 온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소년은 충실함과 경건함에 있어서 동생이나 사촌에 못지 않았으며 희생을 할 때에도 진정 거룩히 잘 했었다.
그는 동생처럼 홍분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발현 후부터는 동생에 못지 않은 열심을 지녔었다. 그는 루치아, 히야친따와 같이 기도도 희생도 했고 그녀들이 제안한 희생도 반드시 설천했다. 그리고 종종 새로운 희생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권하는 것도 그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 특별한 희생을 탐구하여 스스로 실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루치아의 대모가 갓탄 꿀물을 대접하고 싶어서 세 아이를 초대하였다. 대모는 프란치스코에게 먼저 잔을 건냈다. 소년은 잔을 받아서 동생에게 주었다.
“너희들이 마신 다음에"
그렇게 말하고는 마시기를 강요당할까 두려워서인지 살그머니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