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6월 22일 토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마태 6,27-28)
하느님의 섭리와 우리의 걱정
예수님께서 불명료한 것을 자명한 것에 비교하심으로써 그 뜻을 분명하게 밝히시는 것을 알아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걱정한다고 해서 육신의 수명을 한 치라도 아니 그보다 훨씬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함으로써 여러분의 삶을 몇 순간이라도 늘릴 수 있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힘을 미치는 것 같아 보이는 일들조차도 결국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견줄 때, 우리의 걱정과 근섬과 수고 같은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밀랍을 뚫을 정도로 봉인을 누르면, 봉인이 찍히지 않은 부분이 없을 것이고, 그러면 밀랍은 봉인과 구별이 안 되게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정확한 지식으로 하느님께 도달하기만 한다면, 그분의 형상과 모상 안에서 그분과 완전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이야말로 “단순한 앎”이다. 그것은 “영혼이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신적 존재를 직접 알 수 있을 만큼 순수한 앓이다. 신적 존재가 흘러들면서 영혼은 천사들과 똑같이 신적 본성을 받고, 즐거워한다.”
우리의 신적 근원들은 마침내 여기서 만난다.
“내가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면, 나는 단순히 하느님이 되어야 할 것이고, 하느님도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은 단순히 내가 되어야 할 것이고, 나도 하느님이 되어, 이 ‘그분’과 이 ‘나’가 하나의 “존재”를 공유할 만큼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그분’과 이 ‘나’는 이 ‘존재’ 속에서 우리의 일을 영원히 하게 될 것입니다. 이 ‘그분’과 이 ‘나’, 곧 하느님과 영혼은 열매를 많이 맺고, 우리는 영원히 하나의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190)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6월 3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마르 14-16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에 니파나는 유일신 신앙
이슬람교의 분파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수피즘은 <꾸란>의 계시성과 무하마드로부터 내려오는 신성한 전통을 긍정하면서도, 신비주의 특징으로서 알라 그 자신으로부터 계시된 알라의 속성을 조심스럽게 구별하였다. <꾸란>은 알라가 선택한 예언자 무하마드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계시적 말씀이기 때문에, 정통 이슬람 신앙은 정전이 지닌 해석학적 인간의 몫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알라의 절대 초월성을 말히는 동시에 신의 속성과 인간 속성의 동질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신인동형론이라는 모순에 직면하곤 했다.
수피즘은 알라에 대한 모든 언어가 은유이거나 상징이므로 그것을 넘어 실재 그 자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주장했다. 그 길은 학문적 논리의 길이 아니라 인간 내면 깊은 영혼 안에서 신성과 직접 접촉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수피즘 전통 안에 풍요로운 은유적 신학, 상징 신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수피즘은 신을 체험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지성, 이성, 관념보다는 감성적 체험을 강조하였고, 그 절정에 이르러서는 신과 인간 간의 일치 경험을 에로틱한 성애 관계로 묘사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것은 고도의 종교적 은유로서 동서고금의 신비주의에서 자주 보여지는 바이기도 하다. 신비주의에서 신의 본질은 무한하고 온전하게 하는 ‘사랑'이라고 파악되는 것이다.
초기 <꾸란> 중심의 정통 이슬람 교리가 말하는 신의 접근 불가능성, 도덕적 책임을 묻는 엄정성, 심판자로서의 경외성 등과 비교할 때 이러한 수피즘의 모습은 분명 다른 것이다. 그러나 감정을 중시하는 이러한 특징이 오히려 무슬림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시며 수피즘의 대중화에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