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니
의식주 같은 것은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진정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고,
우리가 걱정할 필요 없도록 청하기도 전에 다 주시는가요?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을 다 주시는지는 의문입니다.
필요한 것을 다 주신다면 아프리카의 굶주린 이들이 없어야 하고,
우리의 경험 안에서도 안 들어주신다는 느낌이 없을 텐데 실제로는
굶주린 이들이 너무 많고 우리 기도도 안 들어주신 적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일까 주님께서는 토를 다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제 생각에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달라고만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움을 실천하려는
그런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이고,
필요한 것을 청하더라도 그것이 의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어리면 어릴수록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고,
어리면 어릴수록 자기중심적이고 할 도리를 모르며,
어리면 어릴수록 자기 좋을 대로 하고 대의를 저버립니다.
제 생각에 대의(大義) 중의 대의가 하느님의 의로움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한두 사람의 선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 곧 공동선을 늘 지향하고,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좋은 것을 지향합니다.
그러니 자기밖에 모르는 미성숙한 사람은 대의를 저버리고,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대의를 찾고 공동선을 지향할 것이며,
신앙적으로 성숙하면 하느님의 의를 먼저 찾고 늘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밖에 모르는 소인이나 미성숙한 사람은
기도를 하더라도 자기 좋을 것만 찾을 것이고,
자기 좋을 것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지
실은 자기에게 좋은 것이 아닌 것을 찾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너무도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달라고 청한다고 합시다.
술만 먹으면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 술을 달라고 청하면,
간경화 환자이면서 술을 달라고 청하면 하느님께서 안 들어주시겠지요.
그의 필요를 아시지만
그의 필요가 공동선도 자기 개인을 위한 선도 아닌 필요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얘기해도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의 굶주림과 필요를 하느님은 외면하시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외면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고,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은 외면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집단적인 불의는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의인 다섯도 없었습니다.
아니 아브라함과 롯 외에 아무도 의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 모두가 회개하기 전까지 온난화로 인한 폭염은 계속될 것이고,
니네베처럼 왕에서 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기 배 채우기만을 일삼던
그 탐욕을 멈추지 않으면 남이 배를 곯고 집단적인 기아는 계속될 것입니다.
집단적인 불의에 의한 집단적인 불행과 빈곤은,
하느님도 어쩌실 수 없고 우리 인간이 집단적으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밖에는 답이 없음을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