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용서를 하는데 일곱 번까지 해야합니까?'
한 두 번은 할 수 있지만
일곱 번까지나 해야 하는지
묻는 것 같습니다.
한 두 번은 실수로 잘못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는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실수라고 생각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의도적으로 한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는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용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로 베드로가
완벽함을 의도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을 말씀하시면서
그 완벽함을 넘어가십니다.
우리가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
완벽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일곱 번도 무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훨씬 더 완벽함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청원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둘이나 셋이 모이는 것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 청한다는 것은
인간이 완벽하지 않음을
완벽하지 않아도 됨을 보여줍니다.
둘이나 셋이 모이는 것도
혼자의 힘보다 훨씬 낫기에
즉 혼자의 힘은 부족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아시는 분이
인간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즉 용서는 내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내가 아닌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분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만
완전한 용서를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용서를 하는데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상황에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용서하기 힘들 때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 사람과 관계를 끊기도 합니다.
나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면에서는
이 방법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상황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족이기도 하고
수도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특히 수도 공동체에서는
공동체를 바꾼다고 해도
그러한 상황은 여기나 저기나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그 상황에 잘 머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 머물기 위해서는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나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용서가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물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우리가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