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 얘기입니다.
나병은 인간의 힘으로는 지금도 치유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물론 여기서 치유란 병에 걸리기 이전 상태로 돌리는 것을 말하기에
요즘도 병의 진행은 막을 수 있을지언정 치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시대는 더더욱 치유가 불가능한 병인데
주님께서는 자기를 치유해주실 수 있다고 하는 그의 믿음은
대단한 믿음이고 인간의 능력 이상의 능력이 주님께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치유가 어려운 병일수록 치유 가능성은 믿음의 영역이고,
불치병의 치유는 더 많은 믿음이 요구되는 영역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이고,
아주 드문 믿음의 소유자이지요.
사실 그 당시 그 말고도 나병환자가 수많았을 텐데
그들은 치유를 불가능한 것으로 믿고 고치려고 들지 않았고,
예수님께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믿고 치유를 청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차례 얘기한 내용이지만 인간은 다 믿는 존재입니다.
가능을 믿는 존재와 불가능을 믿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한다고 믿는 존재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존재가 있을 뿐이고,
전능하시다고 믿는 존재와 그렇지 않다고 믿는 존개가 있을 뿐이며.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는 존재와 그렇지 않다고 믿는 존재가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믿는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선택입니다.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하느님도 불가능하다고 믿고,
하느님은 사랑이 아니라고 믿기로 인간은 선택할 수 있고,
그렇게 선택한 인간은 나병을 운명 또는 숙명으로 알고 살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이 없으시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나병은 운명(運命)도 숙명(宿命)도 아닌 하느님의 뜻 곧 신명(神命)이라고 믿고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 곧 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에 자기 나병을 맡길 것입니다.
나병을 주신 분도 하느님이시니
나병을 고쳐주실 분도 하느님이시며
고쳐주실지 말지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과 순종으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았지만 사렙다 마을의 과부만 구해주시고,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나아만만 고쳐주셨다고.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도 이런 믿음으로 하느님 뜻 곧 처분에 자기를 맡깁니다.
나병을 주신 하느님이 나병을 고쳐주시는 것도 하느님 뜻이고 사랑이며,
나병을 주신 하느님이 고쳐주시지 않는 것도 하느님 뜻이고 사랑이라고
믿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맡깁니다.
이렇게 믿는다는 그리고 맡긴다는 오늘 나병환자의 믿음에
주님도 배신하실 수 없으셔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맡길 것인가? 말 것인가?
다 나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