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얼굴인 우주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기까지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만물의 형상이시며” (골로 1,15)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완전에 이르게 됩니다.” (골로 2, 9-10)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 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골로 3,10)
삼위일체 하느님의 형상이 온 우주의 모습이라고 바라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형상은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숨어 계신 하느님의 마음을 그렇게 불러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볼 수 있는 우주를 통해 창조주의 마음이 보이니까요. 실재는 철저하게 서로 연관되어 존재하고 생명의 에너지들이 관계성 안에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나도 내 주변의 피조물과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주 전체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상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며 거기서 나의 실존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재 안에서 우주가 인간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 중심 사상들이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을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내어주는 법을 배우고 공존의 지혜를 배우지 않으면 인간은 우주의 지배자요 정복자로 자처할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구축된 삶의 실재 안에서 나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못하는 우상의 실재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너와 피조물과의 간격을 메우시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서, 우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창조의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 믿음의 기초를 든든하게 해 줍니다.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반응은 육화를 드러내는 도구적 존재로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드러난 굴복하는 겸손일 것입니다. 피조물의 세계에서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한 부분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끝없는 우월감에 중독되어 모든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블랙홀처럼 관계를 파국에 직면하게 만들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은 관계 안에서 나를 어디에 두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관계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내어주면서 기쁨과 자유를 동시에 얻습니다. 오로지 나밖에 모르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무상의 선물을 자신 안에 쌓아두기만 할 뿐 내어주지 않습니다. 도구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지배하는 통치자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과응보의 틀로 철저하게 무장한 과도한 생각들이 현실과 연결되기보다 고립을 자초하기 때문에 외로움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고독과 외로움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없이 자신을 내어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관계의 진실에 직면하면서 배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자연의 현실보다 설계되고 꾸며진 현실을 좋아합니다. 꾸며진 현실은 자신을 과대 포장하고, 증명하고 스스로 자신을 높이려는 데 집착한 나머지 비교하고 경쟁하기에 바쁩니다. 진실을 감추기 위한 이러한 태도는 믿음의 현장에서 더욱 드러납니다. 우리의 믿음은 태도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영역에서조차 인위적인 현실을 만들어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으로 내면을 감추려고 합니다. 많은 양의 기도문을 외우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희생을 셈하고 거룩한 척합니다. 계명 준수와 도덕적인 성취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업적과 공로를 앞세웁니다. 이러한 자신의 태도는 보이기 위한 숨겨진 의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감추려는 데에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진실을 빵과 포도주에 담아 음식으로 우리를 먹이십니다. 빵과 포도주는 물질적인 현실입니다. 창조의 첫 번째 육화가 예수의 몸에서 인격화된 것이라면 우리의 육화도 평범한 음식으로 거행하는 성찬례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이고 상상적이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현실이며 물질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진실은 진실이 아닙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만져볼 수 없다면 성체성사는 의미가 사라질 것입니다.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의 현장은 일상에서의 우리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아니라면 아무리 많이 성체와 성혈을 받아마셔도 나를 변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받아 모신 그리스도의 몸이 육화되는 현장은 나를 내어주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몸으로 너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꺼이 나를 내어주면서 관계의 변화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성체는 변화된 그리스도의 몸이며 어느 한쪽만으로는 나를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듣고 먹어야 물질적인 것이 영적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종류의 겉으로 드러난 현실은 내면의 현실에서 나와야 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슬프게도 잔을 닦고 꽃과 고운 천으로 장식하면서도 여전히 변화하지 않는 몸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 덩이의 빵과 한 잔의 포도주가 육화되는 장소가 나의 내면에 있고, 너와 나의 관계에 있고, 온갖 종류의 피조물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신 것이 변화되는 땅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성체는 변화된 그리스도의 몸이며 나를 내어주게 합니다. 진리를 모두 하나로 묶어 놓은 성사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인 우주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는 육화의 신비가 거기에 있습니다. 나는 변화된 얼굴로 창조주의 형상을 드러내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