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명을 사는 것이고
영성 생활을 잘하면 건강한 삶을 살 것입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셨지 죽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실로 창세기에서 모든 생명은 생기라는 하느님 명령대로 생겨난 존재들입니다.
한자어에서도 생명은 생기라는 명령(命令)대로 생겨났다고 해서 생명(生命)이고,
실로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順命)하지 않은 생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명령대로 순명하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에 따라 얘기하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듯이
진리의 길과 생명의 길을 따라 살면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서 얘기하듯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말씀대로 살면
우리는 진리의 길과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죽었던 소녀는 일어나라는 명령대로 살아납니다.
이렇듯 살아나는 존재는 명령에 순명하는 존재이고,
살아나게 하는 존재들은 소녀의 부모처럼
주님을 믿고 생명을 간청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소녀의 이웃들처럼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는
주님 말씀을 믿지 않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녀의 부모만큼 소녀가 살아나기를 간절히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하느님이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고
비웃는 자들이 오늘 지혜서가 말하는 “죽음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죽음에 속한 자들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지혜서가 말하듯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그러므로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은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속한 자들은 하느님 생명에서 탈출한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에서 탈출하면 그것이 바로 죽음에 속하는 것입니다.
빛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바로 어둠이듯
물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바로 고기에게는 죽음이듯
하느님의 생명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바로 죽음입니다.
이것을 저는 오늘 조금 다르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인간 창조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 사람이여, 주 하느님께서 육신으로는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의 모습대로,
그리고 영으로는 당신과 비슷하게 그대를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
주 하느님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육신만 당신 모상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당신과 비슷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을 성자의 모습과 성령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반쪽만 삽니다.
육신 곧 몸뚱이만 살고 영성을 살지 않습니다.
영성이란 성령(Holy Spirit)을 사는 것이고 정신(spirit)을 사는 것인데,
프란치스칸은 프란치스칸 정신(Franciscan spirit)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창세기를 보면 명령대로 곧 말씀으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것으로 부족하셨는지 2장에서 다시 인간을 창조하시는데 이번에는
흙으로 당신과 비슷하게 만드신 다음 그의 코에 당신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우리말의 목숨은 이렇게 한자어의 생명과 달리 목에 숨이 들락날락하는 것이고,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하느님의 숨 곧 성령이 우리 목을 들락날락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숨 곧 성령이 우리 목에서 끊어질 때 우리 목숨은 끊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영성을 산다는 것은 성령을 사는 것이고,
성령을 살 때 우린 육신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과 영혼 모두
생명을 살고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죽음에 속한 자 될 것인가? 생명에 속한 자 될 것인가?
그 선택이 앞에 놓인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