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오늘 율법 학자는 당시 율법 학자들 가운데 보기 드문 존재입니다.
제자로 받아들이셨는지 알 수 없지만 훌륭한 제자의 본보기입니다.
우선 그는 다른 율법 학자들과 달리 주님을 스승으로 삼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율법 학자들은 자기들이 교사들이기에 늘 주님을 트집 잡았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의 저도 훈장 기질이 있어서
늘 남을 가르치려 들었고 지적질하기 바빴으며 교만하기 이를 데 없어,
그 누구를 진심으로 스승 삼은 적도 없고 삼으려고 들지도 않았었지요.
어쨌거나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는 주님을 스승 삼으려고 든 것만으로도
훌륭한 제자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는데 하는 말도 훌륭함을 보여줍니다.
“어디로 가시든지”라고 합니다.
의미를 굳이 가르자면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스승을 따르겠다는 것이고 스승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것이며,
그래서 생사고락을 같이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요한 가르침만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전부를 스승에게 거는 것이며 진정한 존경과 사랑의 표시입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는 분이 있는 곳에 늘 자기를 위치시키는 법이지요.
사랑하는 분이 있는 곳이 자기가 있을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보이니 주님께서도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렇다. 나를 따르는 것은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러니 각오하여라.’
뭐 이런 식으로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수도원 입회하려는 성소자에게 이렇게 충고하며
상당수가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습니다.
수도자의 경우 수도원은 천사들만 살 것 같은 환상이 있고,
연인들의 경우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사는 달콤한 꿈만 있지,
같이 살아야 할 고달픈 삶은 생각지 못하고 기대 심리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수도자이건 연인이건 풋사랑일 때는 이런 기대 심리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성소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누가 수도원에 들어오고 누가 시집 장가가겠습니까?
지금 많은 젊은이가 수도원도 들어오지 않고 시집 장가가지도 않는 것이
이런 풋사랑의 낭만이 없고 현실의 어려움을 너무 크게 보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주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며
십자가 지는 것을 각오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고,
풋사랑에서 시작하여 수난의 사랑(Passio)으로 사랑이 성장해야만
완성할 수 있는 길임을 묵상하며 감히 따르기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