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마태오복음은 5-7장이 산상수훈,
곧 율법과는 다른 주님의 가르침 모음입니다.
그리고 8-9장은 주님의 갖가지 치유 모음인데
오늘 복음은 치유 얘기들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구마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군중과 바리사이들의 반응이 정반대입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되지요.
어떻게 같은 것을 보고 이렇게 다른 반응이 나오는지.
그것은 겸손한 군중과 교만한 바리사이들의 차이일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교만은 자기가 최고이고 자기만 선하기에
자기 밖의 모든 사람을 무시하고 악하다고 단정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군중에 대해서는 율법도 모르는 족속이라고 곧 무식한 사람이라고 무시하고
주님께 대해서는 마귀 우두머리의 졸개일 뿐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악평합니다.
주님께 대해서도 이렇게 간단하게 악으로 평가하니
그들의 밑에 있는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을 자들이다.”라고 저주하고,
안식일 법과 정결례 법을 어긴다고 다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니
오늘 주님께서 한탄하시듯 군중은 그들 밑에서 다 기가 꺾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한편으로는 저 자신을 반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를 보며 저도 주님처럼 가엾은 마음도 가집니다.
정말 저 자신에 깨어있지 않으면 저도 악평의 대가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님께도 깨어있어야 하지만
제가 얼마나 뼛속부터 교만한지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요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가엾게 생각합니다.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경쟁 안에서 모든 사람이 기가 꺾여 있기 때문입니다.
회의할 때 보면 이것이 잘 드러납니다.
얼마나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지.
그런데 그것이 상처를 줘야겠다고 작심하고 주는 것이 아니고,
부지불식간에 상처를 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경쟁 사회의 부지불식의 교만 때문입니다.
부지불식이란 알고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의식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지요.
자기도 모르게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겁니다.
경쟁 사회 안에서는 남을 깎아내리고 내리누르고 악평해야
자기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무의식 안에 박혀 있고,
그러는 가운데 터무니없는 우월감과 교만이 역시 부지불식간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처럼 교만하고 악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부지불식의 교만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래야 서로 기를 꺾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기를 살리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