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오늘도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주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어제와 오늘의 말씀을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평화를 빌어줘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지 마라!
발의 먼지를 털고 ‘쿨’하게 떠나라!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라!
사람들을 조심하라!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복음 선포를 위한 파견이
기본적으로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로 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양들이 이리 가운데 가면 당연히 잡아먹히는 것이 뻔한데
주님께서는 그런데도 가라고 하시는 것이며,
그런데도 사람들을 조심은 하되 걱정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우리보고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며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게는 내가 너희를 위해 걱정하고 있으니
너희는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랑이 느껴지며
나의 사랑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걱정한다면 단순히 걱정하는 잘못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더 큰 잘못을 범하는 셈입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어리지만 부모가 있기에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가 더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걱정을 내가 한다면 부모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지요.
부모가 없다면 내가 걱정해야 하고,
부모가 있어도 부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걱정해야겠지요.
마찬가지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걱정해주시는 하느님이 계신데도
걱정한다면 하느님의 그 사랑을 믿지 못한다는 부인할 수 없는 표시지요.
그렇다면 조심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걱정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것이고,
조심은 그래도 생산적이기에 하라고 하시는 걸까요?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걱정은 진정 쓸모가 없고,
조심은 안 좋은 일을 예방하는 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신앙적으로 보면
하느님이 보살펴주시니 조심 안 해도 된다는,
그런 무모한 믿음으로 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조심하는 것은
조바심하는 것과는 다르고,
방심하는 것과는 반의어이며,
깨어있는 것과는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방심하게 되면 악마가 침입해도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에 비해
조심하게 되면 악마가 침입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요,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깨어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바 조심은 다 하고,
그런 다음에는 하느님 사랑을 믿기에 걱정하지 말고,
내일 보게 되겠지만 두려워하는 것은 더더욱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