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그리스도가 알려지지 않을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의 선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려 주십니다. 그들의 선포가 영광스러운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기 왔다. 나는 그림자 안에 감춰져 있는 빛이며, 사람 안에 숨어 있고, 겸손 안에 높임올 받은 하느님이다. 이 신비는 오랫동안 감추어져 왔지만, 너희를 통해서 모든 이에게 드러날 것이다. 그 신비가 ’하늘 끝에서 나와 다시 끝으로 돌아가니, 아무것도 그 열기 앞에서 숨을 수 없네‘(시편 19,6).’ 해가 보이지 않고그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알려지지 않고, 그분의 신성이 이해되지 않는 곳은 아무 데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류는 두 부류, 믿는 이들과 변명할 길 없어 처벌받게 될 믿지 않는 이들로 나뉩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깨어남은 (장소 의식이 아니라) 공간 의식에 대한 깨달음일 것이다. 깨어남의 넷째 단계는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관계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서 영원히 다스린다. 우리는 하느님 안으로 녹아 들고, 하느님은 우리 안으로 녹아든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의 깨어남은 안, 곧 우리의 안과 하느님의 안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쏟아 붓는 충만한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똑깥은 사랑으로 나를 사랑한다.
다른 곳에서 엑카르트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기울이는 철저한 사랑을 되풀이하는데, 이 주제야말로 그의 전 영성과 우리 깨달음의 뿌리가 된다.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입니까! 무엇이 하느님의 사랑일까요? 그분의 본성과 그분의 존재,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기울이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내치는 사람은 그분의 본질을 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존재는 우리에게 기울이시는 그분의 사랑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 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입니까! 하느님은 자신의 전 존재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존재는 사랑에 의존합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됨이 마치 사랑에 의존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한 가지 사랑만을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외아들을 사랑한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십니다.(202)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7월 1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로마 8-13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에 니파나는 유일신 신앙
이슬람교의 분파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유대인과 아랍인의 전쟁에서 '성전'은 없다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실펴보는 이 장을 미감하기 전에, 우리는 이슬람교의 지하드에 관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 기구 및 아랍국가 사이에 그치지 않는 전쟁과 살육, 자살 폭탄과 테러 등이 놀랍게도 종교적 이데을로기인 ‘거룩한 전쟁'(지하드)이라는 신념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전쟁' 이라는 개념에는 인류의 전쟁사 속에서 적들과의 대치속에 있는 어느 부족, 민족, 국가, 국가 연맹체가 자신들의 전쟁 목적이 정의롭고 정당하다는 것과, 그러므로 신은 당연히 자신들을 도와 자신들 편에 서서 싸울 것이며, 따라서 신이 싸우시는 거룩한 전쟁에 동참하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 영광스런 일이라는 신념이 들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은 지구촌 시대에 고대 사회에서나 있음직한 성전(聖戰)이란, 한갓 정치 이데올로기를 종교적 포징지에 써서 위장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일 리 없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경전인 <토라>와 <꾸란> 속에는 ‘거룩한 전쟁'에 관한 놀랄만한 사상이 담겨 있는 만큼, 오늘날처럼 전쟁 수단과 무기가 발달한 상황에서 ‘거룩한 전쟁' 이데올로기를 용납하게 된다면, 적대 관계에 있는 아랍인과 유대인은 함께 망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으며, 지구상에는 종교로 인한 전쟁의 광기가 더욱 가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지녔던 ‘거룩한 전쟁' 신앙과 이슬람 발생 초기의 ‘지하드' 신앙의 그 본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를 바로 밝힌다면, 초강대국들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쉽사리 변질되는 ‘성전'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