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았기에 코라진이 불행하다고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저는 제가 불행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김찬선 레오나르도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제 생각에 불행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행복한 줄 모르는 불행과,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입니다.
그런데 행복한 줄 모르는 것이 왜 불행이고,
불행한 줄 모르는 것은 또 왜 불행합니까?
행복한 줄 모르는 것이 불행이라는 것은 사실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행복한 줄 모르는 것은 행복할 줄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행복할 줄 모르기에 행복한 줄 모르는 것입니다.
행복할 줄 아는 것은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행복으로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다른 행복과 큰 행복을 욕심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할 줄 앎으로써 행복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은 이런 식으로 행복하면 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에서 회개함으로써
참으로 행복할 줄 알라고 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는 다 우리의 참 행복을 위한 것이고,
우리가 불행으로부터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이며
그래서 사랑의 호소이지 불행해지라는 저주가 결코 아닙니다.
사실 불행한 줄 알면 불행으로부터 회개할 겁니다.
그런데 불행한 줄 모르기에 계속 불행하게 삽니다.
그렇다면 행복한 내가 왜 불행하다고 하시는 겁니까?
앞서 얘기한 것이고 그래서 다시 얘기하는 것이지만
지금 이 세상의 행복에 만족하기에 불행한 것입니다.
더 풀이하면 이 세상의 행복에 만족하고 안주하기에
저세상의 행복을 살려고 하지 않아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하고
저세상에서도 행복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럴 수는 없을까요?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얘기입니까?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부터 소유하면 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선언입니다.
“영 안에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가 그것 아닙니까?
영 안에서 가난하면 이미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에
지금 여기서부터 곧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부터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만 행복하면
그것이 진짜 불행이고 이 불행으로부터 회개하라고
오늘 주님께서 불행 선언의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불행 선언에서 오히려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