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나약함 안에서 꽃피는 말씀의 통치
하느님의 통치, 곧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도구적 존재로 살아가는 내가, 나와 다른 무수한 너와 피조물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를 배우도록 초대하십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고통이 없는 신비스러운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다른 모든 것들과 참으로 연결될 수 있는 그런 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창조된 우주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이 얼마나 섬세하게 연결되어 존재하고 있는가를 발견하게 하심으로써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내가, 존재의 원천인 창조주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나는 너와 피조물이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의 통치를 통해 우리 안에서 상호 간에 주고받는 생명의 에너지를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그 에너지를 발견하면 할수록 온 세상이 우리의 거룩한 성당이고 성경이 약속한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이며 성프란치스코가 지고 다녔던 은둔소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도덕적 성취를 위하여 사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는 길보다 연결을 배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사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다가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사적으로만 구원을 추구한 나머지 인간 실존의 바탕인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관계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신비였습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자비와 선으로 관계의 혁명을 이룸으로써 살리고 회복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옳은 것이 다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일 뿐, 옳다고 해서 저절로 연결되거나 선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라고 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런 다음에 나를 따라라” 율법은 죄가 무엇인가를 알려줄 뿐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은 율법을 초월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서로 연결된 존재 안에서 실현되는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상호 간에 내어주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홀로 족할 것인가? 더불어 행복할 것인가? 움켜쥘 것인가? 내어줄 것인가? 올라갈 것인가? 내려갈 것인가? 섬길 것인가? 지배할 것인가? 협력을 구할 것인가? 명령할 것인가?
우리가 사는 세계는 두 종류의 세계입니다. 하나는 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으로 시작된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입니다. 인과응보의 틀에서 사는 사람은 언제나 힘을 중심으로 설계된 세계에서 살아가며. 말씀의 통치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통치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힘으로 지배하는 분으로 해석합니다.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이유처럼 내어주는 사랑으로 내 안에 있는 나를 빼내어 너와 피조물에 다가가게 함으로써 나에게서 내가 벗어나게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현장에서 맛보는 즐거움, 말씀의 권위와 나약함의 아름다운 조화가 이 작은 피조물인 나에게서 실현되는 놀라움 안에서 나는 육화의 기쁨을 맛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내 안에 있는 나를 통제할 수 있도록 당신의 삶과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순수한 사랑의 동기를 단단히 붙잡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의 힘이 배제된 힘의 실현은 잔혹하고 사악합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사랑으로 일하심으로써 내 안에 있는 다른 힘과 충돌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선택의 기로(岐路)와 마주하게 됩니다. 나는 선을 선택할 때마다 하느님의 승리를 경험합니다. 주님의 영께서 그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몸의 요구와 체면과 평가에 민감하여 악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외롭고 허전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마음의 밭에 떨어진 씨의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씨는 네 종류의 마음의 밭에 뿌려집니다. 돌밭과 길바닥과 가시덤불에 떨어진 말씀에서 자기 모습을 찾아내고 발견한 사람만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처럼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간직하고, 행하고, 이를 반복하는 가운데 얻는 수확의 기쁨이며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로 누리는 말씀의 신비입니다. 성령 안에서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인 사람만이 누리는 해방의 기쁨과 자유입니다. 더 많은 말씀이 내 마음을 차지할수록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사라지고 영의 활동에 자신을 내어놓게 됩니다. 도구적 존재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나약함으로 돌밭과 길바닥과 가시덤불이 되기도 하지만 말씀의 권위가 인간의 나약함 안에서도 이를 통합하여 조화롭게 만드십니다. 말씀의 권위가 내면에서 나와 다투는 가운데 선을 택하도록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빈번하게 넘어지고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선택하고 결단하고 책임을 지려는 의지에 차 있습니다.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인 이들은 외부의 적과 싸우지 않고 내면의 적과 싸웁니다. 이로써 무상의 선물을 받아 들고 나를 내어주기까지 믿음의 현장에서 매력으로 끌어당기는 성령의 활동에 내어 맡깁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기 위해 변화의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누룩이 되어 부풀어 올라 빵의 반죽이 되기까지,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동요는 계속될 것입니다. 연결을 위한 진통이 관계 안에 선이 출생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다가왔다고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마태4,17) 그러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은 우리의 관계를 뚫고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둘이나 세 사람, 그들 안에서 서로를 내어주는 선의 흐름을 볼 때 지금과 미래의 교회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여 회심을 통해 자기에게서 해방된 이들이 누리는 자유를 봅니다. 말씀의 권위가 인간의 나약함 안에서 꽃피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