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7월 17일 수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다른 민족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로 갔다가 다른 민족들에게로 옮겨 가는 것을 예견하신 아버지를 찬미하고 찬양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종의 모습으로 육화하신 당신의 사명에 대해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께 감시를 드리고 계십니다. 당신에 관한 이 신비를 지혜롭다는 이스라엘에게는 감추시고, 아직 철부지인 다른 민족들에게는 드러내신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키시어, 정해진 때가 되자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입증하십니다. 이 모든 일이 참으로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하느님께서는 그에 앞서 은총의 회개를 그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는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담긴 의로움에 대해 별말씀 없이 지나가시지만, 다른 곳에서는 분명하게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얻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 잘못입니다.
-오리게네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엑카르트는 하느님만이 죽음에서 일으킬 수 있고, 하느님만이 생명을 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다. 이 일은 너무나 고귀하고 고상하여, 하느님만이 이를 수 있다.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의 역할은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여정, 곧 깨어남의 여정의 단계들을 알고, 우리 자신을 깨우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그 여정을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의 모든 완전과 지복(至福)은, 우리가 모든 피조물과 시간과 존재를 통과하고 넘어서서, 마침내 궁극적인 터전에 도달할 때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204)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7월 2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로마 14-16장 / 갈라 1-3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6절: 청빈운동, 이단과 이단 신문
성서주의와 예수를 따름:
네델란드의 열렬한 개혁가 탄겔름은 성직자의 재산 소유를 반대하고, 성직자의 세속적인 생활을 매우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이러한 비난은 결국 교계제도와 성사적인 교회와의 유심론적(唯心論的)인 투쟁이 되고 말았다. 그는 성체성사도 거부하였다. 그는 1115년에 민중에 의하여 타살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단은 계속 영향을 미쳤다. 1124년에 노르베르토는 안트웨르펜 근처에서 이 이단을 반대하는 셜교를 하였다. 급진적인 이탈리아의 속죄 설교가인 브레시아의 아르놀드도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한 교회를 요구하고, 교황직에 대하여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로마 시의 정치적인 책동에 연루되었을 때, 그는 더 높은 정략 정치에 걸려들고 말았다. 프리드리히 적발제는 1115년에 그를 처형하였다. 그의 추종자들인 “아르놀드파”들은 그후 발두스파와 카타리파로 넘어갔다.
발두스파는 리옹의 부유한 상인 베드로 발두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1173/1176년경 마태오 복음 10장 5절 이하를 읽으면서 청빈 이상을 발견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청빈과 속죄 설교의 엄격한 사도직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신의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신봉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난한 자들” 또는 “리옹의 가난한 자들” 이라고 자칭하였다. 그들의 선의에서의 설교는 기존의 현상에 대한 과장과 격렬한 비판을 담고 있었고, 신앙에 대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리옹의 주교는 그들이 평신도이기에 신앙문제에 대해 언급할 자격이 없다며 그들의 설교를 금지하였다. 발두스는 교황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문의하였다. 그는 1179년의 제 3차 라테란 공의회에 나타났고, 교황 레오 3세는 그의 청빈 이상을 치하하면서 선교만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에게 순수한 속죄 설교를 허락하였다. 이 조건은 막연하고 불확실한 것이었다. 리옹의 주교는 발두스가 그 조건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난을 하며 다시 그의 설교를 금지하였다. 발두스는 다시 로마에 의뢰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황 루치오 3세가 엄하게 반응하였다. 교황은 1184년 그에게 모든 설교활동을 금지하고, 그동안 과격한 형태를 취한 그의 운동 전체를 비난하였다.(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