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 주님 말씀은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졌을지라도
우리가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기쁜 소식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런 기쁜 소식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누구에게 찾아가지 말고 당신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삶이 너무 고달프고 힘들 때 우리는 누가 생각납니까?
즉시 엄마가 생각나고 엄마 품에 안기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엄마보다도 주님이 더 완전한 안식을 주신다!
이렇게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구에게 갑니까?
주님입니까? 엄마입니까? 다른 누구입니까?
주님이 아닌 다른 누구라면 왜?
그의 안식이 주님의 안식보다 낫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주님의 안식이 아무리 완전하고 탁월할지라도
멀리 있는 휴게소처럼 내게는 멀거나 내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의 안식은 사실 우리가 얻기 쉽지 않다는 면에서
멀리 있기도 하고 우리 입맛에 맞지 않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안식을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안식은 겸손과 온유로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기가 쉽습니까?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겸손하고 온유하기는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지요.
주님께서도 고생을 아니 하고 짐을 지지 않게 해주심으로써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지 않고 짐을 지되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마음으로 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안식은 얻기 쉬운 것이 아니라 어렵고,
이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어차피 져야 할 짐을 가볍게 지는 비결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차피 져야 할 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를 남의 십자가라고 하거나
내가 왜 그것을 져야 하느냐? 왜 나만 이런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이렇게 분노하기도 하고 따지기도 하며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것이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마음이 아니지요.
그리고 이런 마음일 때 짐이 더 무겁고 견디기 힘듭니다.
요즘처럼 후텁지근하게 더울 때
‘왜 이렇게 더운 거야!’하며 짜증 내면 더 더울 뿐이지요.
그런데 일부러 불한증막에도 들어가는데! 하며 받아들이면 덜 괴롭지요.
이렇게 어차피 져야 할 내 짐이요 내 십자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바로 온유의 마음이고 겸손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 십자가 곧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는데
프란치스코는 더 나아가 그 십자가를 주님의 십자가로 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매일 지는 일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이 바로 겸손과 온유한 마음을 넘어 사랑으로
그것도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짐을 지는 것인데
이것이 더 완전한 고수 짐꾼이 편하게 짐을 지는 비결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